한·영 만남 200주년, 닮은꼴 역사
  • 부산·宋 俊 기자 ()
  • 승인 1997.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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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행사 계기로 진단한 두 나라의 과거와 현재
올해는 ‘한·영 만남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월부터 12월까지 전국 곳곳에서 기념 행사 50여 가지가 차례로 열린다. 이 가운데 백미는 영국 최대의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호(5월24일 부산 입항)와 ‘떠다니는 왕궁’이라고 불리는 요트 브리타니아호(6월8일 인천 입항)의 방한이다. 행사 규모도 가장 클 뿐더러, 영국 왕실과 해군이 참가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한·영 만남’의 정작 중요한 의미는 행사 이면에 숨겨져 있다. 1797년 당시와 현재의 양국 실정이 신기할 정도로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일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두 나라 총체적 역량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 비교 분석은 ‘한국병’의 실체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영국 항공모함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병의 속내를 살펴본다. <편집자>
5월25일 오후 1시30분.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호(함장 알란 웨스트 제독)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14층 건물 높이였다. 배에 오르는 50m 가까운 긴 트랩 앞에 수천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 ‘바다의 정복자’는 군신(軍神)이 아니라 평화의 사절이었다. 한·영 만남 200주년을 기념하는 방문답게, 이 항공모함은 함포를 굳게 잠근 채 부산 시민 수천 명을 배 위로 초청해 다채로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우정의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일러스트리어스호는 첨단 장비로 무장한 가공할 항공모함이었다. 함상에는 미사일 함포와 발칸포 수십 기말고도, 수직 이착륙기 시해리어와 최첨단 ‘잠수함 킬러’ 시킹 헬리콥터 20여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항해용 레이더, 포격용 레이더, 그리고 인공위성과 교신하는 레이더를 각기 따로 장착한 데다, 호위함과 잠수함 10여 대가 항모를 따라다닌다. 거개의 장비를 영국이 자체 개발했고, 그중 몇몇을 우리가 아직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양국의 커다란 격차를 실감케 한다. 이 격차는 2백년 전 상황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1797년 10월 윌리엄 브로튼 함장이 이끄는 프로비던스호 함대가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동아시아 일대의 해도를 작성하다가 식량과 식수를 얻으러 뭍을 찾은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조선술과 해군력이 근해를 무대로 한 데 견주어 프로비던스호는 당대의 항공모함이었던 셈이다.

이 ‘항공모함’은 16세기 말 스페인의 ‘아마다’ 무적 함대를 물리친 프랜시스 드레이크 함대의 후예로,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호레이쇼 넬슨 함대에게 권위를 넘겨주었다. 특히 넬슨 제독 시절 개발된 새 조선술(Plank-On-Frame 방식:선체 옆에 판자를 대는 기술)은 무거운 병기 수송을 가능케 했고, 훗날 철제 선박 설계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오늘날 항공모함의 먼 조상인 셈이다.

반면 드레이크경과 같은 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이순신 장군이 비슷한 시기에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거북선의 첨단 기술은 사장되고 말았다. 이 첨단 조선술이 계승·발전되었다면 조선의 대외 정책도 궤를 달리했을 것이고, 프로비던스호와 거북선 후예의 만남은 재미있는 비교 대상이 되었을 법하다.

대양 함대는 국력의 뒷받침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하다. 프로비던스호가 조선을 방문할 당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막 일어나고 있었다. <서양 문명의 역사>(스탠디시 미첨 외 공저)에 따르면, 한발짝 앞선 산업혁명이 영국을 부흥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쓴 나폴레옹의 야심도 영국의 부흥을 도왔지만, 어차피 전쟁이라는 ‘제로섬’의 함수는 산업혁명이라는 폭발적 생산력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2백년 뒤 영국은 ‘신(新) 르네상스’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유럽연합(EU)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2% 안팎)을 기록하며, 세계적인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때마침 세계는 제2의 산업혁명에 비견되는 정보 혁명 경쟁을 치르는 중이다. 정보화 기술은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수단인 동시에, 새로운 산업으로서도 각광받는 분야이다. 이 경쟁에서도 영국은 한발짝을 먼저 내디뎠다.

예나 지금이나 수동적으로 시장 개방

2백년을 사이에 두고, 한국의 상황은 다른 각도에서 절묘하게 닮아 있다. 프로비던스호가 조선을 찾았을 때는 정조 말기에 해당한다. 영·정조 시대의 중흥기가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1997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잠깐 맛본 경제적 부흥이 10년도 채 지속되지 못하고 뒷걸음질치고 있다. ‘아시아 네 마리 용’의 지위마저 흔들리는 지경이다.

시장 개방이라는 차원에서도 양상이 같다. 18세기 말엽 조선 연해에 출몰하기 시작한 이양선(異樣船)은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이어졌다(조성오 지음 <우리 역사 이야기>). 1804년 출간된 프로비던스호의 항해 보고서는 ‘지역 관리들이 걱정 끝에 우리에게 떠나기를 요구하다가 여의치 않자 무장 병력을 보내 선원을 감시·경호했다’라고 밝혔다.

이는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팽배한 ‘신토불이 이데올로기’와 닮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 추세에 밀려 수동적·방어적으로 시장을 열어주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이같은 양상의 이면에는 중앙 집권의 폐단, 기득권층과 피지배 계층의 갈등, 거국적 안목 부족이라는 원인이 여지없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다시 정치 불안정과 관료주의(낙후한 행정 서비스)로 이어진다.

영·정조의 개혁은 군주가 주도하고 실학 엘리트가 진행했다. 이 개혁의 ‘진실’이 백성의 인식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스러져버린 것이 바로 중앙 집권의 한계였다(강만길 지음 <고쳐 쓴 한국 근대사>). 정조 사후에 들이닥친 기득권층의 반격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뒤이어 지방 관리의 가혹한 수탈이 따랐다. 이반된 민심은 농민 항쟁으로 발전했다.

이 대립 구도는 일제 식민기·미 군정기·군부 독재기를 관통하며 면면히 이어졌다. 개발 독재 시절 특혜를 받으며 급성장한 몇몇 대기업이 한국 경제의 근간을 형성함으로써, 오랜 전통은 다시 대를 이었다. 농촌의 죽음(생산비를 밑도는 쌀값으로 60~70년대 저임금 노동자의 최저 생계를 충당케 한 결과)이 그 대가였다. 최근 선진국의 시장 개방 압력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념 행사 진행에서도 두 나라 격차 드러나

영국의 발전 양상은 우리와 정확히 대척점을 이룬다. 산업혁명 초기, 급조된 천민 자본주의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영국은 오랜 세월에 걸쳐 노동조합 활동과 사회 보장 제도 들을 강화하는 등 빈부 갈등을 해소하는 데 주력했다. ‘영국병’을 치유하겠다는 대처 총리의 정책도 사회 보장을 철회한 것이 아니라, 적정 수준으로 조절한 것이었다.

최근의 ‘영국 르네상스’를 견인한 것은 리스트럭처링(사업 구조 재구축) 성공이다. 리스트럭처링은 국가 차원과 기업 차원에서 함께 진행될 때 효과를 볼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 산업 구조 조정·효율적 인프라 구축·제도 정비·행정 서비스 개선 등이 이루어지면 그 바탕 위에서 기업의 경영 합리화가 효과를 보게 된다. 기업 리스트럭처링의 핵심은 업종 정비이다. 계열사 가운데 ‘싹수가 노란’ 회사를 정리하고 주력 기업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제조·판매 통합, 유통망 개선 같은 방안이 추가된다. 명예퇴직제를 통해 인건비 절감과 인력 재배치를 꾀할 수도 있다.

영국은 조세를 낮추고(유럽연합 가운데 최저) 중앙 은행에 이자율 결정권을 이양(금융 제도 개선)함으로써 자국 기업 지원과 외국 기업 유치라는 일거 양득을 거두었으며, 국영 사업을 대거 민영화하여 경영 효율을 높이고 있다. 연구·개발 지원 여건도 풍부하다. 특히 ‘원스톱 솔루션 서비스(One-Stop Solution Service:기업이 해당 지역에서 사업을 하고자 할 경우, 행정 담당자가 사옥 설계·준공·컨설팅·금융 지원에 애프터서비스까지 도맡아 책임지는 제도)는 영국이 자랑하는 첨단 행정 서비스이다.

기업 리스트럭처링도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 기업인 롤스로이스사마저도 항공기·선박 엔진, 원자력 발전 등 핵심 사업에만 주력하고 나머지는 매각하거나 폐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영국의 리스트럭처링은 정부·지방자치단체가 자발적으로 추진한다는 점과, 국토의 효율적 개발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모범 사례로 꼽힌다. 예컨대 스코틀랜드(북부)는 스카치 위스키의 본고장답게 ‘청정 환경’을 앞세워 실리콘 글렌을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을 중점 육성한다.

요크셔(중부)는 산업혁명 발상지로서 높은 산업 연계 효과(영국 제조업체의 50%가 2시간 이내 운전 거리에 위치)와 고도의 유통망·금융 지원 시스템을 앞세운다. 런던을 끼고 있는 켄트 지역(남동부)은 교통 요충(거미줄 항공망·항만 시설·해저 터널 등)과 고급 인력 활용에 전념한다.

웨일스(서부)는 가장 눈부시게 성장한 지역으로 꼽힌다. 석탄·철광 산업의 중심지였다가 특수가 가라앉으면서 불황에 빠졌던 웨일스는 ‘팀 웨일스 정신(공공·민간 부문의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번영 가도에 올랐다. 특히 석탄·철광 부스러기가 널린 황폐한 땅에 잔디를 자라게 하는 첨단 기술을 개발하여 쾌적한 환경을 만든 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국내외 기업들을 유치하는 전략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가 왜 리스트럭처링에서 효과를 보지 못하는지, 영국에 비해 얼마나 뒤져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술 수준도 문제지만, 만연한 부실 공사(혹은 자세)·무사안일 행정·부패·후진적 정치와 제도 등은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국과 영국에서 각기 진행된 ‘한·영 만남 200주년’ 행사의 면면이 이 격차를 집약해 보여준다. 한국에서 펼쳐지는 50여 행사는 영국대사관이 주관하고 왕실·해군·기업이 일사불란하게 참여한 데 비해, 영국에서 벌어진 행사는 규모·종류 면에서 뒤떨어진 것은 물론 한국 정부·기업·민간의 합심도 이루어지지 않은 듯이 보인다. 한준엽 <시사저널> 런던 주재 편집위원은 “조수미·김덕수 등이 공연할 것이고, 대영박물관 안에 한국관이 운영될 계획이다. 대사관이 앞장서서 유기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는 않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여전히 우리는 따로’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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