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거품’의 정체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12.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계·금융계 방만한 경영이 위기 초래 …정부 정책 실패도 원인
지난 10월 초 한 신문사가 주최한 ‘한국 경제 대토론회’. 대기업 임원들과 경제학 교수, 경제연구소 연구원 같은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경제 전문가들이 모여, 우리 경제의 위기 상황을 개탄하는 자리였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와 무능한 정부의 정책 대응이 주로 질타의 대상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토론회 장소로 들어가던 공병호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주차장에서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참석자들이 몰고온 승용차가 하나같이 대형차 일색이었던 것. 그는 “지엽적인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것이 한국 경제의 진짜 근본적인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4월 <한국 사회의 거품, 경제 위기, 그리고 재도약>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재계·입법부·행정부·노동계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거품 현상을 지적해, 파문을 불러일으킨 당사자. 그는 이 보고서에서 “경제적인 논리로 정당화할 수 없는 편익이나 권리를 누군가가 누리면 다른 누군가가 그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라고 말했다.
감량 경영의 두 얼굴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 후, 한국 사회는 필사적인 거품 제거 작업에 돌입했다. 그 가운데서도 부동산값 안정을 들어 거품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해 온 재계가 가장 적극적이다. 한라중공업이 3천명 감축을 발표했고, 한화그룹이 1천5백명 감원을 결정했다. 비교적 상황이 나아 보였던 삼성그룹마저 최근 조직과 투자를 30%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재계에서는 감량 경영 선언이 잇따를 전망이다.

그동안 기업들이 터무니없이 덩지를 키워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조처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기업들의 잇단 구조 조정 계획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정리 해고를 허용하는 노동법 개정안이 노동조합의 반대로 유보된 데 대해 기업들이 ‘그것 봐라. 우리 주장이 맞지 않았느냐’ 하고 시위하는 성격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한 구조 조정 계획이 대부분 인원 감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경영자의 잘못을 임직원에게 전가하는 측면도 있다. 최근 노동조합총연맹(노총)은 기업의 감량 경영에는 협조하겠지만, 먼저 현재의 경제 위기에 누가 더 책임이 있는가를 공개 토론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일반인들 사이에는 기업과 정부, 나아가 부유한 계층에 대한 불만도 증폭되고 있다. 기업들이 인원을 감축해 실업이 늘어나고,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 이후 물가가 뛰면, 서민·영세 사업자·중소기업주 들만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투자나 과소비와 같은 거품 현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계층이다. 일은 누가 저지르고 뒷수습은 누가 하느냐는 불만이다.

기업들의 구조 조정에 대한 나라 밖의 평가가 다르다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아시아의 경제 위기 원인을 신랄하게 파헤쳐 눈길을 모아온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최근 ‘불구가 된 아시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특집 기사에서 한국 기업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업 구조 조정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11월10일자). 이 기사는 자동차가 과잉 공급된다는 우려가 느는데도 시설 확장에 여념이 없는 한국 자동차 업계와, 막대한 환차손을 입은 대한항공의 엄청난 항공기 배가 전략, 현대그룹의 제철업 진입 등을 예로 들었다. 가능하면 금융기관 자금을 많이 끌어다 덩지만 키우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는 기업 경영 전략 상의 거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거품 현상이라고 하면, 실물에 비해 금융이 과도하게 늘어나면서 부동산을 포함한 각종 자산의 값이 크게 부풀려지는 것을 뜻한다. 주택 2백만호 건설과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투기 억제책으로 최근 몇 년간 부동산값은 안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들어 거품이 가라앉았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었지만 과연 그럴까?

거품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부동산값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물 경제에 비해 금융 부문이 과도하게 부풀어 있느냐 하는 점에 달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지표가 한 나라의 국내총생산(GDP)에서 금융기관의 총대출액이 얼마만한 비중을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을 비롯해 거품 경제를 겪었던 나라들은 한결같이 대출 총액이 국내총생산의 일정 비율에 도달하면, 그 무게로 인해 경제가 자연히 붕괴되곤 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 대비 총대출액 비율은 한때 110%에 달했었고, 현재 거품이 꺼지고 있는 말레이시아는 120%에 이른다. 아시아 통화 위기의 진원지가 된 태국은 160%에 육박한다. 한국은 지표상으로는 30%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지표와 마찬가지로 이 수치에는 함정이 있다. 총대출액에 원화로 한 대출만 포함하고, 외화 대출이나 지급 보증·신탁계정 등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외국 증권사들은 이를 총대출액에 포함할 경우 그 비율이 130%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한다. 동남아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얘기다.
“과소비 나무라며 기업의 잘못 호도”

이렇게 대출을 통해 돈이 많이 풀리면 기업의 씀씀이가 헤퍼진다. 특히 불필요한 설비 투자가 크게 는다. 설비 투자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게다가 기업들은 설비 투자의 수익률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금융연구원 양원근 연구위원은 “재계는 불필요한 투자를 줄이려고는 하지 않고, 한사코 금리를 내려 달라는 요청만 해왔다”라고 주장한다.

재계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일부 대출금에 대해 상환 기일 연장을 요구하기도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지난 11월27일 30대 그룹 기조실장 회의를 열고 특단의 조처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금융 위기가 심해진 최근에 와서야 일부 기업들은 마지 못해 부동산과 계열사 들을 내놓고 있지만, 이제는 우리 사회가 한꺼번에 쏟아진 매물을 소화하지 못하는 실정이다(88쪽 딸린 기사 참조).

투자뿐만 아니라 경영 관리 면에서도 기업들은 느슨해졌다. 공병호 소장은 보고서에서 우리 기업들의 임원 수와 그들이 쓰는 비용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리 기업 전체 종업원 가운데 임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일본의 7배에 육박하고, 그들 1명당 지출 비용은 연봉에다 판공비·기밀비·차량 유지비 등을 포함하면 대략 1억∼1억5천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경제에 거품이 일면 일반인들의 씀씀이도 헤퍼진다. 자기 능력 이상으로 소비를 하게 마련인 것이다. 지난 6월 ‘우리 경제·사회의 거품’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던 상공회의소는, 소비 행태에 부분적으로 선진국을 앞서는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1인당 국민소득이 만달러 안팎인 나라에서 해외 여행과 승용차 운행 거리, 외식 따위가 선진국을 능가하고 있다(87쪽 도표 참조).

그러나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의 과소비 행태를 거품의 주범이라고 보는 것에는 반대한다. 전체 경상 수지 가운데 고가 수입품이나 해외 여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5% 미만이고, 또 경기 침체가 예상될 때 적당한 소비는 오히려 경기 회복을 돕기 때문이다. 거품을 과소비와 동일시하는 오해가 기업의 원죄를 호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임원혁 연구위원은 “지금 상황에서 외제 안 쓰기나 달러화 모으기 운동을 벌이는 것은 좋지만 근검·절약 운동에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라고 지적한다.

기업과 소비자가 능력을 벗어나는 씀씀이를 보이게 된 데는 정치권과 행정부에도 큰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90년대 초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당시 유행어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 경제는 당시 이미 거품 현상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런데도 정치권과 행정부는 거품을 제거하는 고통스러운 과정 대신 오히려 거품을 부추기는 정치적인 선택을 했다는 지적이다(90쪽 딸린 기사 참조). 94년 들어서 반도체산업을 비롯한 전략 산업이 반짝했던 것도 우리가 거품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이제 기업들의 본격적인 거품 제거 선언이 시작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의식의 거품’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