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출판]레지스 드브레<우리 주님들께 찬양을>
  • 파리·고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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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브레는 알튀세르·게바라 카스트로·미테랑 등 자기 삶을 통해 직접 맞닥뜨린 ‘우리 주님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받은 ‘정치 교육’을 펼친다. <우리 주님들께 찬미를>은 실패한 혁명가, 변절한 혁명가의 기록이
93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미디어 학자’ 레지스 드브레(58)가 거의 8백 쪽에 이르는 두툼한 자전적 에세이 <우리 주님들께 찬미를>(갈리마르 출판사)을 펴냈다.

플로베르의 소설 <감정 교육>의 한 대화를 책 앞에 제사(題詞)로 깔고 있는 이 책의 부제는 ‘정치 교육’이다. 그 정치 교육은 그가 알튀세르·게바라·카스트로·미테랑 등 자기 삶을 통해 직접 맞닥뜨린 ‘우리 주님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받은 교육이기도 하고, 그가 뒷세대에게 전수하고 싶은 우울한 교육이기도 하다.

드브레는 철학·정치 평론·문학 창작 분야에서 이미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써낸 저술가이지만, 그의 이름이 프랑스와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저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소설을 방불케 하는 그의 곡절 많은 삶을 통해서이다.

 
파리의 부르주아 구역인 18구에서 태어나, 특수 엘리트 학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공산주의 서클에서 열성 맹원으로 활동한 뒤, 볼리비아의 숲속에서 게바라와 함께 목숨을 건 게릴라 활동을 하고, 그곳에서 체포되어 3년간 감옥 생활을 했으며, 뒤에는 미테랑 대통령의 비서까지 지냈으나, 끝내는 이념과 사람과 역사와 정치에 대한 환멸에 떠밀려 평범한 사인(私人)으로 돌아와 50대 중반에 소르본에서 미디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얻은 드브레의 삶은, 이제 저물어가는 세기의 광기에 오래도록 매혹되어 있던, 그러나 결국 환멸밖에는 챙기지 못한 수많은 불행한 영혼의 한 극적인 예를 이룬다.

‘나는 공적인 삶과 정치가들을 혐오한다’라는 문장으로 그는 이 기다란 자서전을 시작하고 있지만, AK 47 소총과 바주카포로 무장한 채 볼리비아의 산속에서 보낸 그의 20대 한 시절만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세미나실에서 세계 혁명을 꿈꾸던 고등사범학교 시절부터 바로 이 책을 출간한 지금까지 그의 삶은 줄곧 공적인 삶이었고, 정치적인 삶이었다.

63년 사르트르가 주관하던 <현대>지에 스물다섯 살 먹은 드브레가 기고한 카스트로주의에 대한 글은, 젊은 공산주의자의 정치적·공적 삶의 한 전기를 이룬다.

그 논문을 읽은 게바라가 <현대>를 카스트로에게 보냈고, 카스트로는 그 글에 반해 그 필자를 아바나로 초청했다가, 볼리비아로 보내 게바라를 돕게 했다. 혁명 수출이 좌절되고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피살된 뒤 3년 동안 징역살이를 끝내고 드브레가 파리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칠레의 좌파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자신의 친서를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미테랑에게 전달해 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다. 드브레가 아옌데의 사절 자격으로 인연을 맺게 된 미테랑은 그때로부터 10년 후 자신이 집권하자 드브레를 엘리제궁의 상근 사절단에 포함시켰다.

정치적 비관주의에서 나온 기록

<우리 주님들께 찬미를>은 그런 모든 만남들과 그 만남이 야기한 정치 교육의 기록이다. 그것은 자기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그토록 부끄러워했던 완고한 제3세계주의자가 드골적인 프랑스주의자로 서서히 변모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지난 1월에 죽은 전직 대통령을 한때 자신의 아버지라고까지 공언했던 미테랑 지지자가 그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호메이니나 카다피나 사담 후세인이나 밀로셰비치 같은 ‘히틀러의 후예들’이 진보의 대의를 독점하고 있는 세상을 보는 그의 눈빛에서 정치적 비관주의를 씻어내기는 어렵다.

이 책은 실패한 혁명가의 기록이고, 또 어쩌면 변절한 혁명가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책은 위대한 기록이다. 저자의 삶의 일부분이었던 다채로운 등장 인물의 역사적 무게 때문에라도.

이 책의 제사로 인용된 플로베르의 문단은 논리 과잉과 감정 과잉 때문에 각자가 원하던 사랑과 권력을 얻지 못한 두 사람의 인생 실패담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함께 우연을, 상황을, 그들이 태어난 시대를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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