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2002년 월드컵, 문화로 승부내자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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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월드컵' 전략 마련 분주...'해원, 상생을 이념으로"
 
앞으로 6년. ‘아쉽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게 했던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 결정은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치를 것인가, 그것도 일본과 함께’라는, 짧은 질문 긴 모색의 단계로 진입했다. 일찍이 지방자치단체들이 개최를 준비해온 일본은 ‘다 된 밥에 떨어진 재’를 어쩌지 못하는 형국이지만, 국가 차원에서 공동 개최를 따낸 한국은, 발 빠르게 ‘문화 월드컵 전략’ 수립에 착수했다.

지난 6월27~28일 문화체육부와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은 ‘2002년 문화 월드컵 어떻게 치를 것인가’라는 화두를 놓고 대토론회를 열었다. 서울 올림피아호텔에서 열린 이 토론회에서는 문화 월드컵이 지향해야 할 이념과 목표, 구체적 방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영수 문체부장관은, 2002년 월드컵은 세계사적으로나 우리나라의 진로로 보아서나 중요한 전환점이라면서, 우수한 한국 문화를 세계인들에게 선명하게 부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회는 서울올림픽을 반면 교사로 삼았다. 서울올림픽을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패한 전쟁이라고 본 것이다. 한국문화정책개발원 김문환 원장(서울대 교수)은 “서울올림픽 열기를 국민의 문화 의식으로 승화·발전시키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2002년 문화 월드컵은, 문체부의 아이디어만은 아니었다. 지난 6월18~20일 전국의 만 20세 이상 성인 남녀(제주도 제외) 천명을 대상으로,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한 의의와 영향, 월드컵의 성격 및 지향점 등을 조사한 결과, 문화 월드컵이 그 결론이었다. 월드컵 유치에서 가장 큰 의의는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국제 행사를 유치한 점’으로 나타났다(41.9%). 월드컵이 지향해야 할 성격은 ‘문화 월드컵’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40.6%), 다음으로 환경·정보·과학 월드컵 순으로 집계되었다.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는 일본과의 경쟁에서 한국이 강조해야 할 점은 시민 의식(48.4%), 전통 문화와 예술(38.6%)이라고 답했다.

개·폐회식 프로그램은 물론 경기장 안팎에서 치러지는 문화 올림픽이 ‘국제적 책임감을 갖고’ 지향해야 할 이념은 해원(解寃)과 상생(相生)이었다. 김문환 원장은, 2002년 월드컵이 한국으로 하여금 마지막 분단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세계적으로는 20세기의 산물인 대립 관계를 탈피(해원)하고 문화 월드컵을 통해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상생 원리를 가시화하고 내면화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상생의 원리는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는 한·일 양국은 물론, 무엇보다 남북 분단을 해결하고, 나아가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놓여 있는 지구촌에까지 확대 적용되는 한국 문화의 한 구성 원리이다.

김순규 문체부 문화정책국장은 문화 월드컵을 국가 이미지와 연관해 바라보았다. 서울올림픽을 치렀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외국인이 한국을 알지 못한다. 93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0%, 유럽인의 33%가 한국을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 한국 문화 홍보가 절실한 단계인 것이다. 김국장은 한국 문화가 중국이나 일본 문화의 아류로 과소 평가되는 한 한국은 각 방면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면서, 독자성·지시성·기억성·계속성·대표성을 갖는 국가 이미지(통합 이미지) 개발과 홍보가 시급하다고 보았다.
 

“역사·문화 없는 도시에서 경기 열면 망신”

건축가 김석철씨(아키반 대표)는 문화 월드컵을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도시 문화 월드컵’이라는 개념과 청사진을 제시했다. 한 도시에서 개최되는 올림픽과 달리 월드컵은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데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은 한·일 두 나라의 여러 도시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김석철씨가 보기에 한국 도시 문화의 현주소는 매우 열악하다. 서울을 제외하면 국제 도시가 없다. 그러나 일본의 지방 도시는 도쿄의 아류가 아니라 독자적 문명을 가진 도시들이다. 김씨는 “역사와 문화를 갖지 않은 도시에서 월드컵을 유치하게 된다면 오히려 국가적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라고 경고했다.

김석철씨는, 도시 문화 월드컵은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은 물론 월드컵 이후 도시 문화를 염두에 두고 ‘2002년 월드컵 코리아시티’를 선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신도시는 자연과의 공생, 역사적 자기 정체성, 문화 공간 인프라, 도시의 안전과 접근성, 한국형 체육문화 공간 등 다섯 가지 기준에 따라 선정, 혹은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의 시대인 21세기를 주도하는 새롭고 신선한 비전을 도시 문화 월드컵을 통해 창출하자는 기획인 것이다.

문화 월드컵의 또 다른 구성 요소는 문화 관광이다. 조흥윤 교수(한양대·문화인류학)는, 한국 문화가 아직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교수는 사적·유물·국보 같은 문화재만을 고유 문화라고 인식하는 고정 관념(열등감)을 털어버리고, 의식주와 세시 풍속은 물론 관혼상제·종교·민간 신앙·향토 잔치 놀이에 이르기까지 문화에 포함해 관광 상품으로 포장하고 홍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교수는 특히 일본의 섬세하고도 잘 포장된 관광 문화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한국적 문화 관광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즉 한국 문화의 특성인 신명(무질서 속의 폭발적 기운)과 조화를 바탕으로 먹거리·볼거리·살거리·놀이 요소와, 그동안 특히 부족했던 홍보 기능을 강화해 유기적 연관을 이룰 때 문화 관광 월드컵이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문화 월드컵을 위한 대토론회는 선언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한국 문화를 중심으로 한·일 신시대와 21세기 새 문명을 위한 반성과 전망을 모색한 자리라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문화 월드컵의 진정한 과제는, 곧 표면화하겠지만,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과 북이 어떻게 손을 잡아 나가느냐 하는 문제이다. 밖으로는 일본과 지구촌, 안으로는 남과 북이 ‘해원, 상생’해야 한다. 그 어떤 대회보다 어려운 월드컵일 테지만, 그래서 그 어떤 월드컵보다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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