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해' 빛내는 <한국명시><한국현대대표소설선>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6.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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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시> <한국현대대표소설선> 등 잇달아 출간…‘문학의 해’ 빛내는 대작들
문학의 해가 반환점을 돌아섰다. 팡파르가 울리고 몇몇 행사가 징검다리를 놓았지만 문학의 해가 지닌 뜻에 값하는 ‘작품’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문학의 해를 문학의 해답게 자리매김하는 것은 문학 행사가 아니라 문학 작품 그 자체다. ‘국악의 해에 피리 소리 한 자락 들리지 않는다’는 푸념이 문학의 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인가라고 되뇌던 문단과 출판계에 세 ‘작품’이 잇달아 선보였다. 이제야 문학의 해인 것이다.

 
최동호 교수(고려대·국문학, 문학 평론가)의 편저 <한국 명시>(상하권. 한길사), 임형택 교수(성균관대·한문학) 정해렴(창작과비평사 편집고문) 최원식 교수(인하대·국문학, <창작과비평> 주간) 등이 엮은 <한국현대대표소설선>(전9권. 창작과비평사), 그리고 작가 이문열씨가 기획한 <이문열 세계명작산책>(전12권. 살림). 이 대형 선집들이 문학의 해를 겨냥했던 것은 아니다. 문학의 해는 지난해 하반기에 결정되었고, 이 선집들은 짧게는 3년, 길게는 8년에 걸쳐 완성된 ‘공든 탑’이다. 이 세 선집은 저마다 문학사적 성격을 내장하고 있다.

올림픽으로 들떠 있던 88년, 시인이자 평론가인 박덕규씨와 함께 기획한 <한국 명시는 당초 설계도를 수정해야 했다. 현대시 초기부터 80년대까지를 아우르기로 했는데 막상 자료를 수집하다 규모가 지나치게 방대해져, 결국 70년에 등단한 시인에서 멈추기로 했다. 1905년 최남선에서 출발하는 이 장대한 명시 항해(상하권 모두 2천60쪽)는 한국 현대시사에 찬연한 1백61개 항구를 거쳐 조정권 시인에서 일단 닻을 내린다.

시인들의 시세계 맛깔스럽게 집약

최교수의 지휘 아래 하응백 교수(경희대·국문학) 강웅식씨(고려대 박사 과정) 문학 평론가 이혜원 씨 등 13명이 참여한 <한국 명시>는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중요 시인을 엄선해, 각 시인마다 간단한 약력과 시세계와 생애를 집약한 비평적 해설(평설)에다, 각 시인의 시세계를 깊이 탐사하려는 독자·연구자 들을 위해 90년까지 학계에 보고된 성과물들을 참고 문헌으로 추가했다.

하권 맨 처음에 실린 김수영(1921~68) 시인편을 펼치면 ‘출생: 1921년 서울. 학력: 도쿄 상대 중퇴, 연세대 영문과 수학’에 이어 등단 시기, 경력, 저서 등이 나오고 평설이 이어진다. ‘김수영은 문학이나 인간 자체가 매우 다양한 표정을 지녔던 시인이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관류하는 정신은 김수영 문학의 핵심이라 규정할 수 있는 그의 정직성(순간을 다투는 윤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평설이 <한국 명시>를 다른 명시선과 선명하게 차별화를 이루는 대목이다. 길이는 짧지만, 각 시인의 생애와 시세계가 집약된 ‘압축 파일’이다.

88년 월(납)북 문인들이 해금되면서, 다시 말해 정×용이 정지용으로 거듭나면서 시문학사는 본격적으로 복원되었지만, 소설은 그 몸집 때문인지 반쪽 문학사를 수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지용·백 석과 같은 시인들이 독자에게 ‘노출’된 것에 견주어 김동립 현 덕 김사량 양건식 송 영(宋影) 강경애 같은 소설가들은 아직도 낯설다.

<한국현대대표소설선>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지금까지 제대로 주목되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민족 문학의 품 안으로 끌어들인 것과, 40년 일본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이었던 김사량의 <빛 속에서>를 비롯해, 태화산인의 <우의> 현상윤의 <핍박> 염상섭의 <남충서> 이선희의 <창> 등 그동안 일반 독자가 읽을 수 없었던 명작을 발굴해 소개한 데에 있다.

이 소설선은 ‘20세기 한국 소설의 풍부하고도 준수한 수확물을 총정리’하는 동시에 최 선의 교열을 통해 정본을 지향했다. 문학 평론가 임규찬씨와 김재용씨(연세대 객원 교수·국문학)가 엮은이로 참여한 이 선집은 한국 현대 소설 문학의 진경을 단편소설에서 발견한다. 위기의 연대, 열악한 시절 에 상업주의적 통속화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그 매서움과 단정함을 단편 형식으로 일구어 냈기 때문이다. 엮은이들은, 이 소설선이 인간이 살아 숨쉬고 시대의 고뇌가 각인된 금세기의 ‘연대기’일 뿐만 아니라 ‘풍속의 역사’라고 명명한다.

<이문열 세계명작산책>은 이문열 문학의 아버지, 이문열 정신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세계 명작 선집’이다. 4년 여에 걸친 기획과 번역을 거쳐 완성된 이 선집 1차분 다섯 권은 세계 명작 1백20편을 주제 별로 나누고 이문열씨가 쓴 작품 해설(1천5백장)을 덧붙였다. 문학 청년 이문열의 내밀한 독서 체험에 근거한 이 선집은 단편소설을 쓰려는 소설가 지망생과 소설 연구자 들에게 헌정된다.

이문열씨는 “이 선집을 엮은 의도는 소설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지만, 어쩌면 실제적인 효용은 교양으로 접근하는 쪽에 더 높게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우리 삶을 구성하고 지배하는 다양한 주제가 세계 각국의 거장들에 의해 어떻게 소설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또 녹아나오는지를 비교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책읽기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선집은 화석처럼 굳어 가고 있는 한국 소설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단비’이기를 희망한다.

세계 명작 선집 제1권은 <사랑의 여러 빛깔>. 샤토브리앙의 <르네>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를 위한 장미> 그리고 스탕달의 <바니나 바니니> 등 문학의 프리즘을 통과한 사랑의 다채로운 빛깔을 단편소설 열 편에 담았다. <르네>는 청년 이문열에게 애절함과 격정, 회한과 고독, 지성과 교양을 두루 일러준 격조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토마스 울프의 <그대 다시 고향에 못가리>와 함께 습작 시절 이문열의 문장 교사였다.

여름 휴가철. 결국 내다 버릴 것으로 가득찬 배낭 한구석에 한국 명시와 소설, 세계 단편소설의 정수들 가운데 한 권을 집어넣으면 어떨까.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문학의 해에 맞이하는 휴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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