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상]'이승희 증후군'과 한국 정서의 가벼움
  • 宋 俊 기자 ()
  • 승인 1997.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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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모델 이승희 ‘이상 열풍’…배후는 위대한 한국인·순결 콤플렉스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비 효과’(북경에서 나비 한 마리가 펄럭인 바람의 미동이 미국에 허리케인을 일으키는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카오스 이론의 한 가설)가 발생했다. 미국에서 날아온 노랑나비 한 마리가 한국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노랑나비’는 누드 모델 이승희씨(27)의 별명이다. 이승희씨가 입국한 5월9일을 전후해 보름여 한국은 열병에 가까운 ‘이승희 증후군’에 빠져들었다. 입국 당일 김포공항에 몰려든 2백여 기자의 취재 경쟁을 시발로 하여, 매끈한 이승희 사진을 곁들인 대형 기사들이 연이어 일간지·주간지·여성지 지면을 장식했다. 여러 방송 프로그램들도 ‘이승희 모시기’에 앞을 다투었다.

이승희의 입국을 열흘 앞두고 출간된 자서전 <할리우드의 노랑나비>(문학세계사)와 누드집 <버터플라이>(도서출판 천마)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5월10일 오후 서울 영풍문고에서는, 이승희 사인회가 열리기 1시간 전부터 누드집을 구입한 팬들의 장사진이 매장을 빙빙 둘러 3백m가 넘는 긴 줄을 이루었다.

방송국들의 앞 다투어 ‘이승희 모시기’

입국일에 맞춰 출시된 CD롬 타이틀 <이승희> (스타우스 제작)도 히트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패션 문신 바람이 분 점도 특이하다. 패션 문신은 피부에 문질러 문양을 찍어내는 스티커의 일종으로, 4~5일 동안은 물에 잘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나비 문신이 불티나게 팔리는데, 이씨의 배꼽 아래 왼쪽 부위에 새겨진 예쁘장한 나비 문신이 누드집을 통해 알려지면서 수요를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희 나비 문신’ 코너를 마련한 ㅁ백화점에 따르면, 스티커 매출액만 하루 평균 40만원(백개)이 넘는다.

이승희 증후군의 2라운드는 브라운관을 거쳐 PC통신 토론장에서 불붙었다. 특히 <밤의 이야기 쇼>(KBS1)와 <한밤의 TV연예>(SBS)에 대해 시청자의 항의가 빗발쳤다. 누드와 벗는 행위를 소재로 삼아 시종 음담 분위기가 풍기는 대화로 일관했다는 지적이었다. <밤의 이야기 쇼>의 경우, 진행자 ㅇ씨가 이승희에게 춤을 춰 보라며 가슴 쪽에 달린 마이크를 직접 떼 주었다든가, 옷을 입지 않았다고 상상해 보자며 이야기를 진행한 부분 등이 비판을 받았다.
<한밤의…>는 방송측과 매니저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진전되었다. 리포터로 나선 개그맨 ㅈ씨와 MC ㅇ씨 등이 ‘벗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가’ ‘이승희가 젖소 부인을 날려버렸다’ 따위 언사를 거듭하자, 이승희의 이미지가 실추하고 있다고 판단한 매니저 ㅈ씨가 이를 가로막고 나섰고, SBS는 매니저의 이런 행동까지 그대로 화면에 내보내며 ‘공들인 상품이 손상될까 봐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비치도록 몰고 갔다.

이 방송을 본 시청자들이 PC통신으로 몰려들어 성토 대회를 벌였다. 출연자에 대한 비판은 물론 프로그램 폐쇄, 방송국의 각성과 사과 등을 요구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한편에서 방송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부당한 권력 행사를 규탄하는 동안, PC통신의 다른 방에서는 ‘이승희 누드, 외설인가 예술인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4월4일 처음 개설될 때부터 격렬한 양상을 띠었는데, 그의 입국·방송 출연과 때를 같이하여 그 모양이 더욱 강파르게 전개되었다. 심지어 ‘이승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멋대로 벗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막무가내 식의 반응도 적지 않았다.

원색적인 고함을 비켜나서 논지와 예우를 갖춘 주장들을 간추려 보면, 한국 정서의 얼개를 보여주는 다양한 시각이 드러난다. 우리 문화·지성의 지형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이 지형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이승희’가 함유하고 있는 문화적 변수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문화와 지성의 ‘휘발성’ 노출

이승희는 △동양인 최초로 <플레이보이> 표지를 장식한 모델이며 △인터넷을 통해 유명해졌고(네티즌이 뽑은 ‘누드 모델 베스트 5’에서 인기 배우 데미 무어를 제치고 3위에 올랐다) △평균 성적 A학점을 받으며 장학금으로 의과대학을 다니다 말고 느닷없이 누드 모델을 택한 ‘튀는 여자’이다.

이승희의 매력은 당당함에서 나온다.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알몸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누드 모델을 자랑스런 직업으로 여긴다. 동시에 그는 △풍만한 유방이 성형 수술로 만든 것이며, 누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치모를 예쁘게 다듬는다는 사실까지도 주저없이 밝힌다.
게다가 그의 삶은 △‘인간 승리’의 감동으로 읽힌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그는 불우한 환경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인종·여성 차별의 벽을 훌쩍 뛰어넘은 듯이 보인다. 그런 그가 △한국 국적을 고집하며, 미국인 친구들에게 김치찌개를 권하기도 한다.

한국에 와서도 이승희는 여전히 당당하다. 밝은 표정으로 ‘누드의 진실’을 외치고, 자신의 야망을 밝힌다. 브래지어 ‘라보라’(거평패션)의 새 전속 모델로서 거침없이 광고 촬영도 마쳤다. 영화 <해당화>(감독 이윤택)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이승희는 벌써 7억원 이상 수입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이씨의 내력과 초고속 성공이 이승희 증후군을 불러일으킨 셈인데, 곰곰이 되짚어보면 이는 그가 등장하기 전부터 한국 사회에 불붙기 직전의 휘발성 상태로 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희 누드 논쟁은, 한국 문화·지성의 성분이 휘발성임을 보여주는 ‘모델 하우스’인 셈이다. PC통신에 등장한 여러 주장은, 컴퓨터 밖 사회의 현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논쟁의 골자를 정리해보면 이 관계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맨 먼저 ‘위대한 한국인’ 콤플렉스가 꼽힌다. 이승희 누드에 대한 옹호와 비판은, 그가 ‘세계 누드계의 한국인 대표 선수’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일단 자의로 이승희를 ‘국가 대표’로 삼아 놓고, 그 사실이 자랑스러우면 ‘애국자’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매국노’로 결론짓는 어법이다.

다음은 견고한 정조·순결 콤플렉스이다. 이 관념은 곧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순결’로까지 확대 적용되는데, ‘누드=매춘’ 혹은 ‘성=성관계’라는 인식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하영은(한국누드모델협회 대표) 진도희(영화 배우·대표작 <젖소 부인>)와 배꼽티·미니 스커트가 이 관념의 ‘심의’를 거친 바 있다.

이중성과 엄숙주의, 냄비 근성까지 드러내

이승희 누드 논쟁과 관련한 다양한 주장들은, 두 콤플렉스를 X·Y 축으로 삼은 그래프 위에 고스란히 담긴다(위쪽 도표 참조).

이 그래프는 이승희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문화적·심리적 위상이다. 그 위에 성의 상품화·이중성 따위와 관련한 ‘성 담론’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전문가 수준까지 웃자란 일반인의 인식이 콤플렉스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 평론가 김창남 교수(성공회대학·신방과)는 “한국인의 철학적·인식론적 기반이 빈약하다는 것이 치명적 결함이다. 그러다 보니 생각은 다양해졌어도 파편적 인식에 그치고 사회적 건강성은 제자리 걸음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이승희 증후군의 정체는 ‘성의 상품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승희가 성공한 배경이 이를 입증한다. <플레이보이>와 자매지 <란제리>의 커버 모델로 출발하여 인터넷 사이트의 인기를 타고 한국에 진출하기까지, 일관되게 이승희를 지원한 것은 바로 ‘아름다운 알몸(육체·성)’이었다. 본인 주장대로 ‘누드=예술’이라 하더라도, 그의 누드는 독립 작품이라기보다는 그의 ‘상품(몸) 가치’를 높이는 수단이라고 보는 시각이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이승희를 한국에 ‘공급’하려는 측의 전략도 궤를 같이한다. 고급스럽게 포장하자는 것이다. 이 전략은 누드집·CD롬 제작에는 물론이고, 이승희가 출연할 방송 프로그램 선택에서도 기준이 되었다. <시사 매거진 2580>(MBC) <체험, 삶의 현장>(KBS1)은 뜻을 이룬 경우였고 <일요 스페셜>(KBS)에는 끝내 출연하지 못했다.

이 전략은 대충 들어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승희 본인은 이미 망외의 성과를 거둔 셈이고, 이승희 붐이 당분간 지속될 조짐을 보임에 따라 누드집·CD롬을 출시한 쪽도 기대한 만큼 결과를 얻게 될 듯하다.

이승희 증후군을 겪으면서 정작 숙제를 안게 된 것은 국민과 언론이다. 뼛속까지 배어 있는 이중성과 엄숙주의, 그리고 냄비 근성에 이르기까지 고질의 곪은 정도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이중성 문제는 특히 성과 관련하여 두드러진다. 예컨대 환락 산업이 수요 초과로 호황을 누리는 상황에서, 수요(남성) 대신 공급(여성)측에 매질을 하는 세태가 여기 해당한다. 기득권을 챙기면서 욕망도 해소하는 절묘한 방편이다. <에로스 훔쳐보기>의 저자 이 섭씨(나무갤러리 기획실장)는 “이중성은 파행적 권력의 산물이다. 근엄한 모습으로 권력을 강화할수록 뒤로 행동하기가 자유로운 법이다”라고 말했다.

누드·외설 논쟁이 일 때마다 감초처럼 등장하는 ‘청소년 보호’ 타령도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다. 청소년을 위한 교육·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는 나몰라라 하면서, 진보적인 성 논의가 제기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방패막이가 바로 ‘청소년 보호’다. “정교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려 들면 비용이 많이 든다. 가장 손쉬운 방식은 문제를 단순화한 뒤 획일적인 지침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 마!’라고. 그럴수록 병이 깊어가는 것은 물론이다.” 이 섭 실장의 분석이다.

‘누드 사대주의’라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갈등하는 본능>의 저자 공병호 박사(경제학·자유기업센터장)는 “<플레이보이>는 미국의 유명 잡지라는 것말고는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다. 이승희가 <플레이보이>가 아니라 필리핀이나 아프리카에서 활동했다면 법석이 날 리가 있겠는가”라고 강변했다. “억압이 왜곡을 부른다. 성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이같은 문제가 풀린다. 성 논의가 가장 자유분방한 북유럽이 잘 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증후군은 정체하는 나라의 공통점”

언론의 두 얼굴도 질타의 대상이다. 처음에는 이승희 붐을 부추기다가 돌연 비판적인 자세로 돌아서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이에 대해 김승수 교수(전북대·신방과)는 “방송과 신문이 새로운 문화 현상을 다루는 틀을 미처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려면 역사·사회를 읽는 깊은 통찰력이 선행해야 한다. 시청률·판매율 제일주의를 지양하고, 원칙에 입각해 깊이 취재하려는 자세가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문제들을 간과하는 한 ‘증후군’은 여전히 휘발성 변수로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기 십상이다. 이승희 아닌 누구라도 적정 변수만 갖추고 등장하면, 새로운 증후군이 등장할 것은 뻔하다. 이와 관련한 이 섭 실장의 말은 음미해 볼 만하다. “증후군은 시민 사회로 이행하지 못하고 정체하는 나라의 공통점이다. 고여 있던 ‘병적 정서’가 폭발하는 것인데, 문제는 발전이 아니라 ‘도돌이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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