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시인 박해석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5.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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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단련시킨 것은 시였다”
그많던 축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축시 가운데에는 오래 남는 것이 없을까. 기쁨은 시의 생명력에 기여하는 바가 없는 것일까. 최근에 나온 ‘95 국민일보 문학상 시부문 2천만원 고료 당선작’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는, 왜 축시의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시는 우유보다는 술의 손을 잡고, 기쁨보다는 슬픔을 끌어안는 것이다.

뒤늦게 큰 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나온 박해석씨(45)의 시세계는, 생애의 무게가 담겨 있는 슬픔의 미학이 얼마나 강인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전해준다. 그의 시집은 ‘부재하는 아버지’와 ‘우는 어머니’, 80년대라는 시대에 대한 부채감과 소시민적 삶에 대한 연민, 그리고 중년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회한이 주조음을 이룬다.

시를 버림으로써 시 지켜

문학상을 주관한 신문사측에 따르면 신경림·정현종·유종호 세 심사위원의 최종 심사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신경림 시인은 “시집으로 묶여 나오면 가장 주목받는 시집이 될 게 틀림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해석씨는 자서에 밝혔듯이 30여 년 전, 그러니까 경기도 송탄의 효명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전주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황량한 기지촌에서 사춘기를 통과할 때 그로 하여금 현실을 견디게 해준 버팀목은 다름아닌 시쓰기였다.

68년 경희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강의실에서 동급생인 시인 정호승을 만났고, 그 때 맺어진 우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79년 정호승씨가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낼 때 <눈사람을 기다리는 시인>이란 제목의 빼어난 발문을 써 문단의 눈길을 받은 적이 있다. 이번에 박해석씨가 등단했을 때 가장 기뻐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정호승 시인이었다. 정호승씨는 박씨의 첫 시집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민예당)의 배열을 해줌으로써 ‘오랜 빚’을 갚았다.

2학년 때 군에 입대한 그는 군복을 벗으면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만 했다. 몇 군데 월간지 편집장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몰래 시를 썼다. 시 쓰기를 버릴 수는 없었지만, 그 시들을 발표하거나 모아놓을 수도 없었다. 매년, 그는 혼자 ‘송년회’를 가졌다. 1년 동안 쓴 시들을 모두 태워버리는 결벽증적인 의식을 치렀다. 시를 버림으로써 시를 지키려는 자세는 자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89년 여름을 그는 특별한 전기로 기억하고 있다. 장마철이었다. 지붕이 새길래 옥상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마당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치고 말았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시였다. 그는 “생이 이렇게 마감될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이 엄습했다. 이젠 시를 써야 한다는 강렬한 의욕이 솟구쳤다”고 말했다.

몸을 추스리고 나서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씩 시를 썼다. 대학 노트 다섯 권. 거기서 50편을 탈고해 지난해 ‘국민일보 문학상’에 응모한 것이다.

“나를 단련시킨 것은 시였다. 생의 굽이에서 분노와 좌절을 느낄 때마다 마지막으로 기댄 곳은 시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럴 때 그가 기댄 시는 다음과 같은 ‘노래’였다.

‘노래 하나를 품으면 칼이 될까/탱크가 될까 천둥이 될까/어머니, 당신의 적은 산처럼 끄떡없는데/노래 하나를 품으면 그 산이 벼락치듯 무너져 내려/당신 발 아래 평지로 눕게 될까요’(<노래 하나 품으면>). 그러나 그의 노래는 개인적 원한을 해소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었다. 역사와 시대의 억압으로 스러져간, 어머니로 대표되는 진실과 생명을 위한 무기이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강이나 바다, 또는 망치나 깃발 사이에서 서성대고 있다.

20대 젊음에게 서성댐은 생각없음이거나 용기없음일 터이지만 40대 중년에게 서성댐은 죄악이 아니다. 사려 깊은 자의 연민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시대 앞에서 죄책감을 어쩌지 못할 때(<마을 버스를 기다리며> <어머니>), 지나온 삶을 회한으로 돌아볼 때(<쥐가 난다> <몸의 문을 잠그고>) 그리고 낮게 엎드려 사는 소시민의 삶을 자기화할 때(<민간인> <가난의 힘>) 긴 여운을 남긴다.

한 늦깎이 시인의 등장은 요즘 문단 풍토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른바 젊은 시인들의 조로 현상과 경박성을 넌지시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박씨는 “시집 한두 권을 펴내고 곧장 소설 쪽으로 돌아서는 젊은 시인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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