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학술]재조명 받는 바슐라르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5.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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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상상력 이론’ 재조명 소리 높아
불문학자 곽광수 교수(서울대·불어교육학과)가 최근 <가스통 바슐라르>를 민음사에서 펴냈다.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를 ‘만난’ 이래 30년 가까이 바슐라르의 상상력을 연구해온 그는 “이제야 바슐라르에 관한 온전한 내 저서가 햇빛을 보게 되니 기쁘다”고 머리말에서 밝혔다(상자 기사 참조).

얼핏 보기에 곽교수의 감회는 현재성이 없어 보인다. 고현학(考現學)이 아니라 ‘고고학’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곽교수를 비롯해 바슐라르로부터 상상력의 ‘세례’를 받은 학자·비평가·시인 들은 지금이야말로 바슐라르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들에게 바슐라르는 영원한 고현학이기 때문이다.

69년 송 욱 교수가 처음 소개

역사와 문학의 나침반이 한쪽(이데올로기)으로만 고정되어 있던 80년대가 지나가자, 이른바 ‘포스트 증후군’이 90년대의 입구를 휩쓸었다. 포스트 증후군이 남긴 일단의 결과는 과거에 대한 반성은 물론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를 폐기 처분했다. 그것은 과학을 꿈꾸던 문학의 실어증이었다.

바슐라르의 ‘자녀들’은 위와 같은 문학의 위기 앞에서 바슐라르를 권유한다. 이 때의 바슐라르는 고전으로서의 바슐라르이다. 시인이며 비평가인 김정란 교수(상지대·불문과)는, 깊이의 시학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연구자와 작가들은 반드시 바슐라르로 회귀할 것이라면서, 바슐라르는 어느 한 시기에 영향을 미친 문학이론가·철학자가 아니라 문학이 어느 때든 참고할 만한 본질적 이론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국내에 바슐라르를 처음 불러들인 이는 불문학자 송 욱 교수였다. 바슐라르에 대한 송교수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는, 바슐라르의 “철학적 시론은 시 비평이나 감상뿐 아니라 시의 창조력과 시흥까지 북돋워주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고 <문학평전>(1969)에서 밝혔다.

75년에 <촛불의 미학>(이가림 옮김)이 번역된 이래 바슐라르의 텍스트는 속속 번역되기 시작했다. 93년에 나온 <공기와 꿈>(정영란 옮김)을 끝으로 바슐라르의 저작은 거의 다 우리말로 옮겨졌다. 바슐라르의 마지막 저작인 <촛불의 미학>이 나온 이듬해인 76년에 출간된 곽광수·김 현의 <바슐라르 연구>를 전후해 바슐라르는 문학 비평의 주요한 이론으로 떠올랐다. 바슐라르의 상상력 이론은 70년대 후반부터 창작 분야로 스며들기 시작해, 당시 앙팡 테리블이라고 불렸던(비판받았던) ‘시운동’ 동인의 첫 작품집 <시운동>(1980)에서 하나의 발화점을 형성했다.

과학철학자로 출발했던 바슐라르는 그 삶 자체부터 남달랐다. 프랑스 동북부 샹파뉴 지방 바르 쉬르 오브라는 시골읍의 제화공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세 때 고향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잠시 우체국에서 일한 뒤 1년간 군에 복무했다. 이후 그는 파리로 가서 29세 때까지 우체국 정식 직원으로 일했다.

이 때 독학으로 대학 과정을 마치고 28세에 학사학위를 얻은 다음 30세에 고향의 국민학교 교사와 결혼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한 달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군에 재징집되어 5년 동안 참전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11년 동안 고향의 모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그는 36세 때 아내를 잃었지만, 어린 딸 쉬잔느를 혼자 키우며 독학을 계속해 철학 교수 자격을 땄다. 43세에 소르본 대학에서 과학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10년간 디종 대학 강단에 섰던 그는 56세에 소르본 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70세까지 재직했다. 78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정신 및 정치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고, 레종 도뇌르 훈장과 국가문학대상을 수상했다.

‘바슐라르 속에는 너무나 많은 바슐라르가 있다’고 말해지리만큼 바슐라르는 난해하다. 김 현의 <프랑스 비평사>에 의하면, 바슐라르의 30년대 초기 인식론은 ‘공리성에 의한 과학 진보를 설명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과 ‘실재와 진실이라는 개념은 불확실성의 철학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두 가지 혁명적 주제로 압축된다.
“바슐라르는 잠시 감금되었던 것”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학에 기운 바슐라르는 곧 프로이트의 공격적인 이론을 떠나 융의 집단무의식, 즉 ‘원형’으로 옮겨갔다. “바슐라르는 프로이트처럼 한 인간의 역사를 성적 강박관념으로 몰고가지 않고 인간 뒤에 숨어 있는 인류의 자산을 탐사했다. 그는 또한 융보다 더 형이상학적으로 나아갔다”고 김정란 교수는 말했다.

바슐라르가 과학철학자에서 문학연구가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과학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인간 상상력의 집요한 활동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곽광수 교수는 밝혔다. 상상력이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비중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바슐라르가 문학연구가로 변신하면서 문학은 전혀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시의 신비는 읽는 자의 신비’가 되었다.

거칠게 말하면, 바슐라르의 상상력 연구는 아름다운 문학(의 이미지)은 도대체 왜 아름다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 난해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4원소론, 이미지의 현상학, 원형론이라는 상상력 이론의 삼각형을 구축했다. 그가 문학 이미지를 선택한 까닭은, 문학적 이미지가 그림보다 더 생생한 물질적 이미지이기 때문이었다. 곽교수는 이 차이를 쌀과 밥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쌀-떡-밥-술-엿...’과 ‘밥-찬밥-더운밥...’에서처럼 쌀이라는 물질적 이미지가 밥보다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오는 것이다.

‘시운동’ 동인을 결성하고 그 문학관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시인 겸 소설가 하재봉씨는 “상상력에 대한 개념이 막연할 때 바슐라르는 4원소라는 물질을 통해 구체적으로 상상력의 세계를 안내해 주었다. 그를 통해 상상력을 시 속에 육화했다”고 말했다.

바슐라르는 문학 연구 및 비평계를 비롯해, 시운동 동인으로 대표되는 ‘상상력주의 문학’은 물론이고 과학철학·건축·미술 분야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리얼리즘이 장악하던 80년대 내내 바슐라르의 상상력 이론은 방석복(防石服)을 껴입고 있어야 했다. “상상력은 모든 창작과 창조에서 본질적인 문제이다. 바슐라르는 잠시 감금당했던 것 뿐”이라고 하재봉씨는 말했다.

바슐라르는 연구자·작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빼어난 글들에는 삶과 세계에 대한 잠언들이 구석구석 박혀 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함부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공기와 꿈>을 번역한 정영란 교수(방송대·불문과)의 충고가 여기에 있다. “바슐라르의 글에서 적극적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세미한 것도 놓치지 않고 증폭해서 볼 수 있는 정신적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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