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김홍도는 일본의 ''국보 화가'' 였다"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8.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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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씨, 최근 저서 <또 하나의 샤라쿠>에서 주장···에도 시대 동화에서 단서 찾아
샤라쿠(寫樂). 그는 기록을 남기기 좋아하는 일본에서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화가이다. 본명이 무엇이고,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언제 죽었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1794∼1795년 단 10개월 동안 판화 1백40종을 쏟아내고 갑자기 사라진, 그 앞뒤의 종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지난 25년 동안 고대 일본 시가집 <만요슈(萬葉集)>를 연구하고 연구서 일곱 권을 일본에서 출판한 이영희씨(한일비교문화연구소 소장)가 최근 ‘단원 김홍도가 샤라쿠였다’는 내용을 담은 책 <또 하나의 샤라쿠>(河出書房新社)를 일본에서 펴냈다. 그동안 ‘단원이 일본으로 건너가 몰래 활약했다’는 내용이 풍문으로 떠돌았고, 미술사학계가 이를 ‘역사를 도외시한 낭설’로 여기는 가운데 나온 이씨의 책은, 에도 시대 일본 문헌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원 화가로 진경산수화·풍속화·남종화·사군자·초상화·기록화·불화·판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명작을 남긴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조가 가장 총애했던 단원은 조선조 문화 황금기인 영·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였다.

샤라쿠 역시 일본의 문화 황금기인 에도 시대(1603~1867)를 대표하는 우키요에(浮世繪) 화가이다. 우키요에란 에도 시대에 서민 계층을 기반으로 발달한 풍속화로, 유럽으로 퍼져나가 19세기 서양 화단, 특히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일본의 전통 목판화이다. 불과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1백40종이나 되는 작품을 쏟아낸 샤라쿠가 ‘일본의 보배’로 신성시되기 시작한 것은, 베일에 싸인 그의 이력도 그러하거니와, 서양인들이 평가한 가치 때문이었다. 샤라쿠는 스페인의 벨라스케스,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더불어 세계 3대 초상화가로 손꼽히고 있다.
샤라쿠의 화풍·필법, 김홍도와 똑같아

이영희씨가 조선을 대표하는 단원이 일본 우키요에의 대표 작가 샤라쿠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샤라쿠가 등장하는 에도 시대 어린이 교육용 동화 속에 있다. 에도 시대의 최고 작가인 짓펜샤잇쿠(十返舍一九)가 1796년에 제작한 <初登山手習方帖>에서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샤라쿠의 비밀을 해독해낸 것이다. <만요슈> 연구가로서 일본 고대어의 비밀을 풀어냈던 이씨는 ‘일본어로는 뜻 풀이가 되지 않는 낱말’들을 고어·현대어 사전에서 찾는 과정에서 샤라쿠라는 인물을 만났다. 원래 단원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그의 연구는 ‘샤라쿠가 단원과 동일인일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우선 샤라쿠가 활동했던 10개월과 1794년 단원의 행적을 비교해 보니, 그 상황 증거가 딱 맞아떨어졌다. 평생을 그림에 몰두했던 단원이 연풍 현감으로 있던 1794년 한 해에는 단 한 점도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이 시기는 샤라쿠의 활동 연대와 절묘하게 일치한다. 이씨의 눈에는 화풍이나 필법도 유사한 점이 많았다. 단원의 필법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이 정두서미법(釘頭鼠尾法)인데, 샤라쿠의 그림에서도 ‘못의 대가리처럼 붓을 힘차게 넣어 내리긋고, 마지막에는 쥐의 꼬리처럼 올리는 필법’이 보였다.

심증만 가졌던 이씨는 지난 3년 동안 짓펜샤잇쿠의 <初登山手習方帖>을 파고들어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세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그림이 모두 32장 들어 있다. 그림에는 에도 시대의 문자로 휘갈겨 쓴 글들이 곁들여 있는데, 이 가운데 ‘東洲齋’라는 샤라쿠의 별호를 적은 그의 그림도 모사되어 있다(75쪽 그림 참조).

에도 시대 어린이 교육용 동화인 이 책에는 공부를 싫어하는 어린이가 학문의 신 천신(天神)을 만나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천신이 어린이를 데리고 과자 동산이며 가부키(일본 전통 연극) 공연장, 씨름판을 두루 다니며 구경시킨 뒤 어린이 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기에는 교육용으로 지어낸 순수한 그림 동화 같지만, 에도 시대 글자들을 해독한 결과 단원의 일본 행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고 이씨는 주장한다.

“이 책에는 단원에 대한 추억담이 암호처럼 깔려 있다. 그가 왜 일본에 갔으며, 무엇을 했고, 조선에서는 어떤 작품을 그렸으며, 일본에서는 무엇을 그렸으며,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것들이 장면 장면에 다 들어 있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이 그림 동화에는 일본말로 풀이해서는 문법과 내용의 앞뒤가 맞지 않는 구절들이 숱하게 나온다. 이를테면, ‘개(친)라고 생각했는데 개이다’같은 구절은 일본말로는 뜻이 통하지 않을 뿐더러 문장도 성립되지 않는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두고 짓펜샤잇쿠가 문장에 소양이 없다고 치부했으나, 이씨에 따르면 그것은 단원과 동행한 심 인이라는 의사의 이름을 의미한다. ‘친’은 ‘沈’과 발음이 같으며 개를 뜻하는 ‘이누’는 ‘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천신이 사는 집을 묘사한 그림에는 ‘新道入口’라는 글이 적혀 있다. ‘신’은 ‘새’‘쇠’, 곧 ‘金’으로 읽히며, 金과 道 사이에 ‘口’를 넣으면[入] 金弘道가 된다. 일본어에서 口와 弘은 모두‘고’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단원이 일본에서 그림 그린 흔적 발견

“일본인들은 아무리 읽어도 그 뜻을 모른다. <만요슈>와 마찬가지로 그 속에는 우리말로만 해독할 수 있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짓펜샤잇쿠는 그 글들 속에 이중 삼중의 의미를 숨겨 놓았다. 아마도 반(反) 조선 분위기가 팽배하기 시작한 당시에 10개월간 단원과 함께 생활한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증언집을 남기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짓펜샤잇쿠는 마치 어려운 퍼즐을 만들듯 눈물겨울 정도로 열심히 증언하면서, 글자와 그림 하나 하나에 비밀스럽게 의미를 새겼다.

이씨에 따르면, 당시 수원성을 축조하던 정조는 수원성을 화포의 성으로 만들기 위해 단원과 심 인을 일본으로 보냈다. 카메라가 없으니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으며, 심 인은 의사로서 단원의 비서 노릇을 겸했다. 일본의 군비 시설을 살피고 오라는 정조의 밀명을 받은 단원을 일본에서 맞은 짓펜샤잇쿠는 조선 피가 섞인 인물이었다. 단원보다 스무 살 아래인 그는 영조 시대에 일본을 찾았던 조선통신사의 역관 이명화(李命和)와 일본 여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일본에 간 단원은 짓펜샤잇쿠의 주선으로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여행 경비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우키요에는 아니지만, 단원이 일본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교토에서 나온 <송응도(松鷹圖)>라는 그림이 그것인데, 그림에는 ‘朝鮮國 士能 氏金 洲寫’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사능은 단원의 자(字) 가운데 하나이다. 단원이 일본에서 그리지 않았다면 조선국임을 밝힐 이유가 없으며, ‘洲寫’는 섬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림을 그린 종이도 일본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6월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또 하나의 샤라쿠> 출판 기념회에 에도 시대 그림을 연구하는 미술사가이자 <寫樂 實像>의 저자인 세기 신이치 씨가 참석해 한 말을 이씨는 이렇게 전했다. “그가 의문을 품었던 곳에 단원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모두 풀린다는 점을 알고 세기 씨는 너무 놀라워했다. 그는 ‘문헌학적으로는 완벽하다. 화법에 대한 연구가 뒷받침된다면 정설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씨는 일본 사람들이 샤라쿠가 단원과 동일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들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보물을 한국에 빼앗기려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5년 동안 문헌을 뒤지고 3년 동안 해독한 다음 그 결과를 책으로 엮어낸 이씨는 한국 미술사학자들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나는 문헌 연구자로서 문헌학적으로 증명했다. 단원과 샤라쿠의 작품을 비교·연구하는 것은 한국 미술사학자들의 몫이다. 미술사학자들이 내 주장에 반론이라도 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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