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서거 400주년]‘인간 이순신’ 재조명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8.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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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공연 등 추모 열기…학계·문화계, 재평가 작업 활발
민족의 사표이자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의 최후 장면은 잘 짜인 드라마처럼 장렬하다. 옛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노량 해협으로 출진하기에 앞서 당시 전남 순천에서 일본으로 철수하려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퇴각로 보장 요청에 대해 ‘조각배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고 일축했다. 충무공이 약 5백 척으로 구성된 조·명 연합 함대를 이끌고 노량으로 나아간 때는 1597년 음력 11월18일 밤 10시께. 이튿날 새벽(양력 12월16일) 충무공은 왜함 5백여 척을 맞아 싸우다가 불의의 총탄을 맞고 절명했다.

그로부터 400년. 그의 혼령을 모신 충남 아산에서, 한산대첩(1592년)으로 유명한 경남 통영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충무공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충무공의 거룩한 호국 정신과 민족애, 그리고 ‘불패 신화’를 낳았던 그의 전공을 되새기려는 움직임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9월19일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개막해 12월23일까지 충남 공주·경남 통영·광주·부산·서울·대전을 돌며 공연할 예정인 오페라 <이순신>이 대표적이다(69쪽 딸린 기사 참조). 이와 별도로 경남 통영시는 9월30일부터 10월3일까지 ‘한산대첩 축제’를 열 예정이다. 일부 언론사는 이순신 관련 학술 세미나를 준비 중이며, 독서계에서도 이미 〈이순신의 일기〉(서울대출판부) 〈새 난중일기〉(명지사) 등 이순신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하는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와 이순신 붐을 예고하고 있다.

이처럼‘영웅’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 ‘성웅’으로까지 추앙하면서 충무공에게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움직임들은 몇 가지 ‘역사 평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임진왜란 기간(1592~1598년)에 전쟁의 최고 지휘부인 조선 조정은 철저히 무능했으며, 당쟁으로 일관했다. 둘째, 충무공은 이같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직 한길, 나라를 구하려고’ 몸을 던졌다. 셋째, 충무공은 뛰어난 지략과 거북선 건조 등 빈틈 없는 준비로 엄청난 군사적 열세를 뒤집고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왜적 퇴치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넷째, 그럼에도 충무공은 동료 장수인 원 균 등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백의 종군’했다. 다섯째,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충무공은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 원 균이 크게 패한 뒤 궤멸 직전인 수군 함대를 수습해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며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일곱째, 충무공은 노량 해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나라에 대해서는 ‘충(忠)’으로 일관했으며, 가정에서는 ‘효(孝)’를 실천했으니, 그 밑바탕에는 문(文)과 무(武)를 아우르는 고매한 인품이 있었다.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 신화는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5·16 쿠데타 등 격동의 세월을 통과하며 국민의 가슴에 더욱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때로는 핍박받는 식민지 백성에 의해, 때로는 정권의 필요성에 의해 이순신은 국난 극복과 민족 중흥의 용기를 북돋우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학계·문화계 일각에서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같은 인간상은 후대의 필요성에 의해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며 이순신과 관련된 기존 연구 성과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기존의 이순신 연구가 〈난중일기(亂中日記)〉〈징비록(懲毖錄)〉(임진왜란 전후사를 기록한 서애 유성룡의 개인 비망록) 등 이순신 연구 관련 1차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많은 오류를 빚어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순신에 대해 더 객관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려면 이순신 자신이 남겼거나 이순신을 옹호·두둔하는 처지에서 쓰여진 사료로부터 좀더 거리를 두는 대신, 당시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는 〈선조실록〉 등 여러 사료를 가까이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각기 다른 시각으로 기술된 사료들을 비교·분석해 얻은 결론은 기존 연구 결론과 많은 부분에서 불일치를 이루고 있다. 예컨대 원 균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이다.

<선조실록> 기록은 기존 학설과 큰 차이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이 종전 후 집필한 〈징비록〉에서 원 균을 ‘성질이 음험하고 간사하며, 또 중앙·지방의 많은 인사들과 연결하고 있으면서 순신을 무함하기에 힘을 다했다’고 비난한 이래, 그는 이순신과 대비해 늘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무능한 장수’라는 부정적 이미지로만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바로 이같이 비판한 유성룡이 선조 앞에서는 원 균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렸다. 전쟁 4년째인 1596년 유성룡은 선조가 주재한 조정 회의에서 “옛날부터 육장은 수전에 능하지 못하고 수장은 육전에 능하지 못하나, 원 균은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용감히 싸우며 그 모두에 능하다”라고 임금 앞에서 증언했다(〈선조실록〉 선조 29년 11월7일조).

적어도 사료에 나타난 증거로만 볼 때, 원 균에 대한 평가는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과 오늘날이 극단을 달린다. 선조 37년인 1604년, 조정은 이항복·이원익 등 비교적 당파색이 적은 대신들을 조사관으로 임명해 임진왜란 때 공훈을 세운 인물들을 심사한 뒤 공신 등급을 정했다. 이 때 원 균은 이순신·권 율과 더불어 ‘1등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나란히 올랐으며, 그의 휘하 장수 기효근·이운룡·이광악 등도 이순신측 휘하 장수였던 권 준·이순신(李純信)과 나란히 3등 공신 명단에 올랐다. 이는 적어도 선조 당대에서는 이순신·원 균의 공훈을 대등하게 인정했다는 증거다.

임진왜란 이전과 임진왜란 기간 이순신의 행적에 대한 평가도 논란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0년대 말 이순신은 두만강 국경 지역에 배치되어 여진족 방비에 종사했다. 〈징비록〉에는 이 때의 이순신에 대해 ‘일찍이 조산 만호(造山 萬戶)로 있을 때, 북쪽 국경 지방에 소란한 일이 많았다. 순신이 계략을 써서 배반한 오랑캐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유인해 묶어서 병영에 보내 베어 죽이게 하니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비로소 없어졌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는 〈선조실록〉에 나타난 이 시기 이순신의 행적과는 사뭇 다르다. 이순신은 1587년(선조 20년) 가을 수확기에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상관이던 북병사 이 일(李鎰)에 의해 ‘백의 종군’을 강요당하는 등 결코 순탄치 않은 군 생활을 겪었다. 이때의 일로 이순신은 임진왜란 1년 전 유성룡의 추천으로 3계급 특진하여 일약 전라좌수사로 발탁되기 전까지 한직을 전전했다.
최근 일부 이순신 연구가들은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의 행적과 정유재란 때의 유명한 ‘2차 백의 종군 사건’(1597년)도 일방적으로 이순신에게 유리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전라좌수사이던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 균측의 지원 요청을 받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1차 출진한 때는 1592년 음력 5월4일. 이보다 앞서 이순신은 4월 말 원 균측 관할인 남해 기지(지금의 남해시)의 관고(官庫)를 불태웠다. 이유는 남해가 무인지경이 되어 있으며, 전라좌수영 진영과 너무 인접해 왜적의 수중으로 넘어갈 경우 전라좌수영 방어에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분소관고(焚燒官庫)’ 사건은 그러나 이재범씨(〈원 균 정론〉의 저자. 1987년 작고) 등 일부 연구가에 의해 ‘섣부른 오판’으로 평가되고 있다. ‘구역이 다른 것은 고사하고 왜적이 먼거리에 있었는데도 무엇이 급해서 남해 관고를 불태웠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난중일기〉에서도 알 수 있듯 이순신·원 균 양측에 두고두고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새로운 시각 담은 장편소설도 나와

이순신 하옥(1597년 2월)과 이에 따른 2차 백의 종군의 전말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기존 정설은 이들 사건에 대해 ‘이순신이 원 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잡혀가서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판부사(判府事) 정 탁(鄭 琢)의 변호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백의 종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반박하는 연구자들은 〈선조실록〉의 관련 기록을 예로 들면서, 이순신이 하옥된 주요 이유는 오히려 이순신측이 원 균을 모함한 것(陷人於罪)과 이순신이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선조의 어명을 어긴 죄(縱賊不計 負國之罪)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기존 설을 옹호하는 연구가들은 이같은 설을 전면 부정한다.

이순신에 대한 이같은 재평가 작업은 일찍이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상대적으로 부정 일변도로 그려진 원 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부분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80년대의 대표적인 연구가로는 이정일 교수(울산대)와 원 균 연구가 이재범씨 등이 꼽힌다.
최근에는 기왕의 다른 시각을 집대성하여 이를 형상화한 장편 소설까지 나와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현재 서울대에 출강(국문학)하며 문학 평론가로도 활동하는 김탁환씨의 이순신 일대기 〈초인〉(가제)이 바로 그것이다. 해군사관학교 강사로 있을 때 작업을 시작하여 5년여 준비한 끝에 소설을 탈고한 김씨는 “아무리 만인에게 추앙받는 사람일지라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소설을 썼다. 또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고, 쓰이지 않은 역사의 일부를 복원하려는 욕심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김씨를 비롯하여 이순신 재평가 작업을 벌이고 있는 일군의 연구가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바는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가 비록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일지라도, 그를 둘러싼 각종 인물과 사건에 대한 역사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오늘날 정설로 굳어진 이순신 일대기가 조선 왕조 때에는 정조에 의해서,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도된 국가 사업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오늘날 이순신 연구에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인 〈이충무공 전서〉는 탕평책을 한창 펼치던 정조 연간(1795년) 어명에 의해 편찬되었다. 또 이순신 관련 유물·유적이 정리되고, 관련 사료들을 집대성하여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 때였다.

물론 기존 정설을 이어받은 연구가들은 새 조류가 등장하는 것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예컨대 사료의 경우, 〈선조실록〉 등 몇몇 문헌의 사료적 가치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어도 당쟁의 또 다른 산물이기도 한 이 문헌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더 나아가 예컨대 대부분의 원 균 재평가 작업의 경우에서처럼, 한 인물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또 다른 인물에 대한 깎아내리기 작업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정진술 기획실장은 “전사적(戰史的)으로나 인간사적으로나 이순신 평가는 더 이상 재론이 불필요할 정도로 완벽하게 끝났다. 이를 두고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순신을 폄하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순신 ‘신성 불가침’을 옹호하는 진영과, 구름 위에 있는 이순신을 끌어내려 ‘인간화’하려는 진영의 논전은 이순신 서거 400주년을 계기로 한층 더 격렬한 불꽃을 튀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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