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극장의 이유 있는 호황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7.07.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탁월한 기획·마케팅으로 국내외 관객 발길 끌어…참신한 ‘문화 상품’ 쉬지 않고 샘솟아
‘낮잠도 문화 상품이다.’ 웬 엉뚱한 소리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낮잠이 진짜 문화 상품이 되어 팔려 나가고 있다. 사무실에서 잠깐 조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직장 여성들에게 입장료 천원을 받고 고전 음악이 흐르는 편안한 공간을 제공한다. ‘정오의 음악 감상회’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9월 서울 정동극장이 선보인 문화 상품이다. 극장측에서 보면 죽은 시간이나 다름 없는 대낮에 공간을 활용할 수 있고, 소비자 쪽에서는 잠깐이라도 ‘품위 있게’ 낮잠을 즐길 수 있게 하는, 두 욕구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한 프로그램이다.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이 프로그램은,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정동극장이 내놓은 수많은 문화 상품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것이다. 걸음을 막 뗀 극장답지 않게 정동극장은 빼어난 기획과 마케팅으로 한국의 극장·공연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95년 6월15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극장 원각사를 복원한다는 뜻으로 문을 연 정동극장은 개관하자마자 시설 문제로 문을 닫아야 했다. 국립극장 분관으로 출범한 정동극장은 ‘싹수’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다시 문을 연 정동극장은 세간의 우려들을 하나씩 잠재워 나갔다. 개관 2년을 맞은 지금은 한국 공연계에서 단연 돋보이는 아이디어 뱅크로 변모해, 다른 공연장들의 벤치마킹(우량 기업의 우수한 실무를 자사에 적절하게 도입하는 기업의 생존 전략) 대상으로 떠올랐다.

서울 정동 덕수궁 돌담길이 끝나는 지점, 정동제일교회 앞에 있는 정동극장은 대형 국·시립 극장의 10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4백석 규모의 소극장이다. 이 작은 극장이 ‘한국에는 정동극장이 있습니다’ ‘우리 문화 상품의 세계 시장 진출을 선도합니다’라는 당찬 슬로건을 내걸고 국내외를 겨냥한 문화 상품 개발과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1세기는 문화 전쟁의 시대’라는 구호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작지만 단단하게 무기(문화 상품)를 만들고 21세기 문화 전쟁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95년 7월1일부터 정동극장을 이끌어온 홍사종 극장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동극장의 기획물들은 살아 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정동극장의 생존 전략은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기획물과 그것을 판매하는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짜여 있다. 2년 전 재개관하자마자 정동극장은 여러 세대의 소비 욕구를 두루 충족시키는 참신하고 고급스러운 문화 상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극장 생존 전략 ‘고정 관념과 상식 깨기’

<명인 명창전> <저녁 도시락이 곁들여진 청소년을 위한 재미있는 작은 창극 공연> <우수 레퍼토리 초청 공연> <30~40대를 위한 돌담길 추억이 있는 음악회> <문화충돌 기획 시리즈> <전통춤 다섯 유파전> <김영동의 타는 영혼의 불꽃-나의 소리 기행> 같은 기획물이 잇따랐고, 오후 12시30분~ 1시 사이에 입장료 천원을 받고 연 <차가 곁들여진, 직장인을 위한 정오의 예술무대> 같은 상설 공연도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홍사종 극장장은 정동극장의 기획물들을 콜럼버스의 달걀에 비유한다. 대자본과 큰 공연장들의 틈바구니에서 소극장이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고정 관념과 상식을 깨는 전략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동극장은 기업 경영의 마케팅 이론을 극장 운영에 그대로 도입했다. 극장에서 만드는 문화는 상품이며, 극장은 유통 공간이고, 관객은 소비자이다. 백화점과 다름없는 마케팅, 곧 질 좋은 상품 제공에서부터 고객 개발, 철저한 고객 서비스에 이르는 적극적인 마케팅을 채택한 것이다. “제품 지향 중심에서 판매 지향 중심으로 전환하는 마케팅 마인드 없이는 우리의 문화 공간들도 이제 살아 남기 힘들다”라고 홍사종 극장장은 말했다.

틈새 시장 공략을 목표로 정동극장이 개발한 기획물들은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기획물 자체가 질 좋은 아이디어 상품인데다, 마케팅에도 상품 개발 못지 않게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재단법인으로 재출범한 정동극장은 극장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마케팅부를 신설해 다양한 판매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정동극장의 기획물들은 극장 공연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것이었지만, 홍보와 마케팅은 그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것들은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문화 상품권을 발매해 성공을 거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인 공연 홍보가 언론 보도에 크게 의존하는 천수답형이라면, 정동극장의 마케팅은 관개 수로를 충분히 확보한 수리안전답형이다. 귀족화한 예술과 대중 문화 사이에 끼여 어느 것도 즐기지 못하는 세대와 계층에게 미리 투자를 하고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한 해에 관객 12만명, 매출액 4억1천만원

지난 6월30일 막을 내린 연극 <오구>에는 장마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찾아들었고, 한낮 공연에도 청소년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정동극장이 건설해 놓은 관개 수로 때문이다. 평소 든든한 유대 관계를 맺은 대기업·정부기관의 각종 모임과 문화공간이 전무한 신도시의 학교들이 정동극장에 물을 대는 관개 수로들이다.

<전통예술 상설 무대>와 <토요 문화 특활>은 가장 최근에 개발한 프로그램답게 그 내용과 마케팅이 좀더 세련되어 있다. 매주 화·금 요일 정동극장 전속예술단 단원들이 외국인 관광객들을 불러들여 펼치는 <전통예술 상설 무대>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판매되는 유일한 무형 문화 상품이다. 정동극장은 서울의 13개 유명 호텔과 30여 여행사와 제휴해, <서울 문화관광 지도> 10만부를 제작해 배포했는가 하면, 관광 가이드들을 대상으로 ‘외국인 많이 데려오기 대회’까지 펼쳤다. 2월11일부터 시작된 이 공연에는 지금 외국인 관광객 4천여 명이 찾아와 외화를 뿌리고 돌아갔다.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토요 문화 특활>은 정동극장에서의 전통예술 공연 관람뿐 아니라, 농업박물관,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궁중유물 전시관 관람 등 극장 주변의 시설과 환경까지 적절하게 활용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6월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에는 매주 초중고교가 학교 단위로 참여하고, 지방에서도 문의해 오고 있다. 정동극장은 공연 상표를 특허청에 등록해 문화 상품을 브랜드화했는가 하면, 지난해 11월에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터넷 웹서비스를 통한 예술 정보 마케팅 사업을 시작했다. <전통예술 상설 무대>와 공연 정보 등을 알리는 정동극장의 홈페이지(http://www.chongdong.co.kr)에는 무용가 육완순·조흥동 씨 등 전속 예술가 20명이 소개되어 있다. 공연 섭외가 들어오면 극장측은 순익의 20%를 얻게 된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국의 예술 자산을 소개하고 수익까지 얻는 21세기형 극장 사업인 셈이다.

빼어난 기획물과 관객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정동극장에는 지난 한 해 12만명이 다녀갔다. 4백석 규모의 소극장임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에는 문예진흥기금으로 받은 공연 제작비 8천만원을 투입해 4억1천만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공연 제작비로 수십배를 투입하는 대형 국·시립 공연장과 비슷한 수준이다. 홍사종 극장장은 “대중은 극장에서 문화를 만나고, 문화는 극장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간다. 관객을 흡인하지 못하는 극장은 이미 극장 기능을 상실한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정동극장은 벌써 새 기획물을 선보일 가을 공연 준비로 분주하다. 오는 10월 이웃한 호암아트홀·문화일보홀과 삼각 벨트를 이루어 중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음악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이 프로그램에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덕수궁 돌담길과 가을 낙엽, 심지어 극장 옆에 있는 오래된 음식점까지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묶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