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김홍도는 샤라쿠 아니다"
  • 오주석 (서울대 강사·한국회화사) ()
  • 승인 1998.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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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씨의 ‘일본 화가 샤라쿠=김홍도’ 주장에 대한 반론
일본 에도 시대의 수수께끼 판화가 샤라쿠(寫樂)가 바로 조선 정조 시대 최고 화가인 김홍도였다는 이영희씨의 주장(<시사저널> 제 457호)은 대단히 충격적이고, 일면 신선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논리의 모순과 끝간 데 없는 상상, 그리고 언어에 대한 편집증적인 해석과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로 짜여진 신기루일 뿐이다. 이씨의 주장에는 갖가지 문제가 있지만 지면 관계상 가장 기본적인 오류 하나만 검토한다(더 자세한 내용은 최근 필자가 펴낸 <단원 김홍도-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영희씨에 의하면 샤라쿠는 1794년 5월 일본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1795년 1월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기까지 단기간 활약하면서 판화 1백40여 점을 남겼다. 그런데 묘하게도 같은 기간에 김홍도가 활동한 흔적이나 남긴 작품이 국내에는 일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풍읍지(延豊邑誌)>를 보면 김홍도는 1791년 12월22일부터 1795년 1월7일까지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있었던 연풍현 현감으로 재직하였다. 이것은 현지에서 기록된 지방 문서로, 이른바 1차 사료(史料)이다. 경상도 문경에서 조령(鳥嶺:새재)을 넘으면 바로 연풍인데, 조령산의 상암사(上菴寺)라는 절을 중수할 때 새긴 비문에는 1792년 가뭄이 크게 들어 원님 김홍도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일성록>에 김홍도 파직 등 ‘조선 거주’ 기록 생생

가뭄은 1793년에도 거푸 들어서 삼남 지방에 굶는 백성이 속출하였다. 1793년 5월24일자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충청도 감사가 ‘연풍 현감 김홍도는… 나라 곡식에 의지하지 않고 나름대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곡식을 나누고 죽을 끓여 먹였는데, 정해진 규정대로 시행하여 굶주린 백성이 살아나게 되었다’고 보고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연풍현 백성이 5천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3천이 굶주렸다고 하니 기근이 얼마나 심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영희씨는 이 해 가을에 김홍도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이런 와중에 목민관(牧民官)인 수령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가뭄은 1794년에도 계속되어 정조는 홍대협이라는 사람을 호서 지방에 내려 보내어 수령들이 백성을 잘 보살피는지 감사하도록 하였다. 1795년 1월7일 <일성록>에 기록된 홍대협의 보고에는 ‘신이 지난해 11월4일에 명을 받들어 호서위유사로 가서 정황을 살펴본 결과… 연풍 현감 김홍도는 다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하나도 잘한 행적이 없으며(多年居官 無一善狀)… 백성에게 악형을 베풀어… 경내 전체가 소란하고 원망하는 비방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이같이 백성에게 포학한 무리는 중히 다스려 벌주어야 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같은 날 기록의 앞쪽에는 “과인(정조를 가리킴)이 묻기를… ‘연풍 원(김홍도)은 과연 어떠하던가?’ 하니, 홍대협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몸소 살펴보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듣건대 그 정령(政令)이 극히 해괴하다고 하옵니다’ 하였다… 과인은 ‘연풍과 신창 두 고을의 수령은 우선적으로 갈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일은 파직만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1월8일자 <일성록>에 나타난, 비변사에서 올린 의견에는 “저 자가 미천한 몸으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도 보답할 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악을 저지른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미 직책에서 갈렸다고 해서 놓아둘 수 없습니다. 해당 관청에 영을 내려 잡아다 문초하고 엄히 죄를 밝혀야 합니다’ 하니 주상께서 윤허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한편 같은 책 1월18일자에는 ‘의금부에서 미처 잡아 오지 못한 죄인을 사면하는 단자교(單子敎)로 인하여… 김홍도를 놓아 주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필자는 한·일 간을 여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예 빼고서 샤라쿠가 활약하기 직전과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있었던 김홍도 행적의 일부만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반론은 충분할 것이다. 한편 인용문에는 김홍도가 백성을 못살게 군 탐관오리였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필자는 그것이 중인 출신 수령에 대한 모함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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