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개그맨 김국진의 인기 비결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8.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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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김국진의 ‘스타 탄생’ 비결/“뜸 들일 줄 아는 웃음의 전략가”
“남을 웃긴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일”

어려서부터 극과 극을 오가던 성격 탓일까. 그는 일찌감치 ‘중용’이라는 삶의 섭리를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고등학생 때였다. 변증법의 정반합이라는 원리를 배우는데 어떤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세상 만사가 정이 있으면 반이 있어 이 둘이 합쳐져 새로운 정을 만들고, 새로운 정은 또 새로운 반의 저항을 받고 … 한쪽에 치우쳐 살다 보면 다른 한쪽을 잊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무슨 일을 하든 지나치지 않게,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찍부터 마음의 여유를 찾는 법을 배운 덕인지 그는 작은 성공에 연연해 하지도, 작은 실패 때문에 쉽게 좌절감에 빠지지도 않았다. 대학 재학 시절, 그는 거듭 공무원 시험에 낙방하면서도 꿋꿋이 자신을 추스렸다. 93년 신인 개그맨으로는 보기 드물게 일주일에 6개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인기를 누렸지만, 그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뒤로 한 채 과감히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함께 개그맨으로 데뷔해 지금까지 절친한 우정을 다져 오고 있는 ‘감자꼴 4인방’ 멤버 김용만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국진이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드넓은 세계를 겪어 보고픈 욕망이 일었기 때문이다. 재미 교포 위문 공연단 일원으로 방문했던 미국에서 그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집과 방송국을 오가던 자신의 생활에 회의를 품었다. 당시 항간에는 그의 미국행을 두고 많은 억측이 난무했다. 그가 간혹 속내를 털어놓았던 주변 사람들조차 ‘다른 이유가 있겠지’ 라고 뜨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그의 생각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방송을 통해 전세계 코미디를 마음껏 접할 수 있었던 미국 생활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개그맨 혹은 코미디언으로서 한국의 방송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점이 있다면, 창의성의 발목을 잡고 있는 ‘방송 용어’의 제한이다. 말이 무기인 그에게 허용되는 ‘실탄’이 너무 적은 것이다.

개그맨 김국진은 가는 곳마다 사인 공세와 기념 촬영 제의를 받지만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응한다. ‘남을 웃긴다는 것은 곧 그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정의하는 그를 보면서, 페이소스까지 아우르는 천진 난만한 미소로 만인의 사랑을 받아온 찰리 채플린을 연상한다면 과장스럽게 들릴까?
인기 정상에 오른 개그맨 김국진이 95년부터 출연해 온 〈테마 게임〉 초기 녹화 현장에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테마 게임〉은 코미디 세 편을 묶어서 방송했는데, 코미디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출연진이 나와 이야기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김국진 차례만 되면 방청객들의 반응이 유별났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운만 떼어도 방청객들은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를테면 그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말문을 열면 까르르… ‘지난 번에 괴테가 말이죠’라고 한 마디 덧붙이면 우하하… 이런 식이었다. 재담을 펼치기도 전에 방청객들은 ‘뒤집어졌다’. 녹화가 끝나자 현장을 지휘하던 담당 프로듀서가 그에게 물었다. “김국진씨, 방청객 동원했어?”

물론 김국진이 방청객을 동원했을 리는 만무했다. 그같은 방청객들의 반응은 요즈음 그가 출연하는 프로에서도 그다지 낯선 모습이 아니다. 왜 사람들은 그만 보면 일단 웃고 보는 것일까.

김국진이 밝힌 비결은 이렇다. 우선 그는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늘 방청객의 눈을 향하고 있다. 어떤 방송 관계자는 한때 시선을 고치라고 충고한 적도 있다. 수백만에 이르는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먼저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김국진은 호흡과 시선이 맞부딪히는 방청객부터 상대한다. 이 사람들부터 제대로 웃겨야 시청자도 끌어들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서.

녹화 테이프 보며 철저히 분석하는 노력파

김국진이 현장 분위기를 장악하기 위해 구사하는 테크닉은 시선 처리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천천히 뜸을 들이며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시점을 포착하면 방청객들의 배꼽을 향해 아껴 두었던 웃음의 화살을 통째로 날린다.

가령 어떤 상대 출연자에게 느닷없이 ‘야, 너 왜 머리 안 깎았니’라고 쏘아붙여 방청객을 웃길 수 있다. 그 다음에 ‘너 수염도 안 깎았지’라고 말해 또 한 번 방청객을 웃길 수도 있다. 하지만 김국진은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다. 절제를 거듭하며 분위기의 잔물결이 치솟아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야, 너 머리 안 깎았잖아, 어라 그러고 보니 수염도 안 깎았네’라고 내뱉어 카운터 펀치처럼 강력한 웃음을 날린다.

김국진은 사회를 볼 때 좌중을 웃기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분위기에 걸맞지 않는 유머는 풀어 놓지 않는다. 시체말로 ‘오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는 방송 때도 종종 대본을 건너뛰거나 때로는 무시한다. 천재적인 순발력을 지닌 개그맨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뜸을 들이다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는 영악함도 있다.

게다가 그는 대단한 노력파이다. 그의 측근에 따르면, 새벽 2∼3시까지 이어지는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파김치가 되어 귀가한 뒤에도 자기가 출연한 방송 녹화 테이프를 보며 자신에 대한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또 신문을 샅샅히 읽는다. 그러다가 기절하듯 쓰러져 잘 때가 많아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김국진에 이르러 한국 코미디는 웃음을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단계에서 방청객과 호흡을 맞추며 ‘함께 만드는’ 단계로 옮아가고 있다. 탈권위주의와 그에 따른 문화 수용자들의 열렬한 참여로 요약되는 90년대 대중문화 경향은 어쩌면 김국진에게서 가장 적합한 웃음의 패러다임을 찾아낸 것인지 모른다.

부담없는 웃음을 선사하려는 김국진의 노력은 그를 대한민국 반세기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코미디언 자리에 올려 놓았다. 최근 한국갤럽이 전국의 만 11세 이상 59세 이하 남녀 6백37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고 인기 스타’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김국진은 코미디언(개그맨) 부문에서 11∼24세, 25∼39세 연령층에서 각각 1위를 차지했다. 40∼59세 중년층에서도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배삼룡 다음으로 많은 지명을 받았다. 비쩍 마른 체구와 더듬거리는 말투, 애매한 발음을 구사하는 한 젊은 개그맨이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뒤바꾸며 일약 웃음의 정상에 오른 것이다.

김국진은 65년 강원도 인제의 조용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인제 남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반포중학교로 전학 온 그는 인창고등학교, 경기대 영문과를 졸업하기까지 남을 웃기는 재주를 빼면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까지 주먹질은커녕 담배 한 모금 피워 본 적이 없는 얌전한 모범생이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평범하지만, 대단히 특이한 천성을 타고 났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말수 적은 학생이었지만,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있는 곳만 보면 왠지 모르게 ‘피’가 끓어올라 그곳에 달려가 좌중을 휘어잡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때 그가 동원한 유일한 무기는 ‘웃음’이었다. 그가 거쳤던 학교마다 그에게는 늘 ‘명물’ 호칭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둑이’부터 출발한 별명도 ‘눈동글뱅이’ ‘불독’ ‘치와와’ ‘혀 짧은 도마뱀’ 등으로 바뀌면서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혼자 있을 때는 잠잠하다가도 사람들이 모인 곳만 가면 패기 만만해지는 김국진은 자신을 가리켜 극과 극을 오가는 성격이라고 분석한다. 91년 제 1회 KBS 대학 개그 콘테스트에서 입상하기 전까지 그의 꿈은 줄기차게 대통령과 개그맨 사이를 오갔다. 훗날 대통령이 되려고 공무원 시험을 뻔질나게 보면서도, 방송 개그 프로만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 무심코 보아 넘기지 못하는 ‘이중 생활’을 거듭했다. ‘개그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듣는 지금, 그는 어쩌면 두 가지 꿈을 다 이룬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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