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 쓴 첫 외국 소설 <시하눅빌 스토리>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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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바깥을 사유하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모또 택시’(오토바이 택시) 운전사 솜산.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간차(대마초)와 매춘을 알선하는 등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바닥 인생이다. 그는 어느 날 결혼을 언약한 뚜이안이 몸을 팔아 모은 돈 1천 달러를 도박장에서 날려버린다. 이 일이 뚜이안에게 발각되면서 ‘배신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뚜이안은 홀아비 군인 잔톤에게 솜산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고, 솜산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가짜로 처녀 매춘을 알선하는 사기 행각에 뛰어든다. 중국인 관광객을 속여 1천4백 달러를 손에 쥔 솜산은 뚜이안을 찾아가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평온은 잠시뿐. 솜산은 헤로인을 탄 맥주를 먹여 뚜이안을 살해한 뒤, 돈을 챙겨 프놈펜으로 도망친다.

소설가 유재현씨(42)의 단편 <솜산과 뚜이안>은 ‘나’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너’의 생명을 죽이는 일조차 당연시하는 극단적인 물신주의의 세계를 냉정하게 그려낸다. 유씨는 4년 전 발표했던 이 소설에 미발표작 5편을 더해 <시하눅빌 스토리>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펴냈다. 작가는 캄보디아의 남서쪽 해안 도시 시하눅빌을 배경으로 솜산·뚜이안·삐·잔톤·뚜옥 등 이방인들이 벌이는 음울하고 낯선 이야기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유씨의 소설에서 한국인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림 오토바이’니 ‘한국산 승합차’니 하는 것들이 나오지만 동남아시아라는 지리적 리얼리티를 담아내는 소품으로만 기능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사나이>에 등장하는 태권도 사범 리욱조 또한 ‘한국인’이 아니라 또 다른 아시아인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소설은, 한국어로 쓰였다는 것만 빼면, 지극히 캄보디아적(혹은 아시아적)이다. 그런데 그의 소설 속 삽화들은 크메르루지의 프놈펜 진격이나 베트남과의 전쟁, 훈센의 폭압 통치 등 역사적 사실들과 섞여들면서 인류적 삶의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런 점에서 유씨의 소설은 지금까지의 한국 소설과 전혀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이전에도 한반도의 경계를 넘나든 소설이 여러 편 있었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뒤 민족 문학은 다양한 문제 제기를 받으면서 이념적 토대가 흔들렸다. 민족 문학이라는 말 대신 한국어 문학이라는 범주를 설정하자(방민호)는 주장도 나왔다. 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은 이런 시대 상황에서 등장했다.
소설가이자 현직 기자인 고종석씨는 1993년 자신의 해외 경험을 녹여낸 체험 소설 <기자들>을 발표했다. 같은 해 윤후명씨는 러시아 여행에서 모티브를 얻어 <여우 사냥>을 썼다. 권현숙씨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남북한 남녀의 사랑을 그린 <인샬라>(1995년)를 펴냈고, 김이태씨는 장편 <슬픈 가면무도회>(1997년)에서 영국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외국을 전전하는 한국 여자의 이야기를 묘사했다.

캄보디아 등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도 나왔다. 외교관 남편을 따라 캄보디아에서 1년 동안 살았던 윤애순씨는 <예언의 도시>(1998년)에서 ‘총성이 울리면 그냥 전쟁이 났구나 생각하는 혼돈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캄보디아와 한국 젊은이들의 사랑과 음모를 그렸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여행기를 소설로 쓴 김영하씨의 <당신의 나무>(1999년)와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지역에서 겪은 체험을 담은 이혜경씨의 <꽃그늘 아래>(2002년)도 그런 작품들이다.

가장 최근 작품으로는 방현석씨의 <랍스터를 먹는 시간>과 <존재의 형식>(2003년)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던 한국인 주인공이 베트남으로 건너가 거기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베트남과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공유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소설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경계를 뛰어넘어 바깥을 사유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외국이나 외국인은 그야말로 ‘배경’으로만 등장할 뿐이었다. 한국인 주인공은 대개 국내에서 정체성 위기를 겪다가 외국으로 ‘탈출’한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겪은 사건을 통해 자기를 되돌아본다. 그 과정은 어김없이 주인공의 ‘우월한’ 시각에서 진행되고 기술되며, 타자에 대한 배려는 부차적이다.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에 젖어 있는 해외 로드 로망이었던 셈이다.

“이들 소설이 한국 문학의 경계를 확장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지만, 한국 내부의 문제를 해외로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김형중)라는 지적은 따라서 일리가 있다. 반면 유재현씨의 시도는 층위를 달리한다. <시하눅빌 스토리>에서 그는 캄보디아 시하눅빌이라는 외부 공간을 설정한 뒤, 철저히 타자들의 시각에서 우리 내부를 성찰해 보려는 글쓰기 전략을 보여준다.

작가는 1980년대를 운동권 학생으로, 또 노동운동가로 보냈다. <창작과 비평> 1992년 봄호에 단편 <구르는 돌>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지만, 10여 년간 작품을 쓰지 않았다. 대신 전자공학과 출신답게 정보 기술(IT) 사업가로 변신해 돈을 모았다. 마흔을 앞두고서야 그는 다시 작가로 돌아왔다. 대안을 찾아 미국과 멕시코, 남미를 떠돌던 그의 눈에 띈 곳이 아시아, 그 중에서도 캄보디아였다. 그는 1999년 6개월 동안 시하눅빌에서 살았다. 이번 소설집은 그때의 경험을 우려낸 것이다.

그의 소설은 철저하게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다. 더구나 매우 ‘드라이’한 그의 문체는 사기와 협잡이 예사롭게 행해지고 극단적인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를 냉정하게 묘사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유씨는 “캄보디아인을 그려야 하는데 심리 묘사에 치중하다 보면 결국은 한국인이 되어버릴까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일부러 3인칭 관찰자 시점과 드라이한 문체를 택했다”라고 말했다.

유씨에게 아시아는 지리가 아닌 이념의 영역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전쟁과 독재와 가난을 모두 경험한 캄보디아는 세계화의 모순이 응축된 곳이다. 유씨는 “한국인이 아닌 세계인의 관점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고민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열린 민족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라고 말했다.

문학 평론가 고영직씨는 “한국 소설의 외부를 들여다봄으로써 내부를 성찰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유씨의 작품이 민족 문학이 처한 매너리즘을 돌파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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