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읽는 영화의 새로움
  • 趙瑢俊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성 중심 사회의 억압 구조·병리 현상의 감춰진 의미 포착
미국 영화감독 브라이언 드 팔머의 80년작 <드레스 투 킬>은 매우 섬뜩한 스릴러물이다. 화면에 온통 선혈이 낭자한 올리버 스톤의 <킬러> 같은 요즘 영화에 비한다면야 폭력성에서 비교도 안되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공포의 영상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스릴러물의 하나로 인식되어, 일반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흥행에도 실패한 채 그냥 묻혔다.

지난 4월19일 오후 2시 서울 이화동의 조그만 골목에 자리잡은 여성문화예술기획(02-762-6048) 강의실. 이곳에서 <드레스 투 킬>이 다시 상영되었다. 화면에는 정신과 의사인 엘리어트 박사가 자신을 유혹하는 여자들을 면도용 칼로 살해하고, 그 살인의 이유에 대해 추적하는 과정이 펼쳐졌다.

엘리어트 박사는 양성(兩性)을 가진 인물이다. 엘리어트 자신은 여성으로 성전환을 하고 싶어하나, 그 때마다 또 다른 엘리어트인 보비(내면의 여성성을 대표)가 이를 방해하고, 엘리어트를 유혹하는 여성들을 살해한다. 다시 말해 엘리어트는 여성의 유혹을 받으면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던 보비가 튀어나와 여장을 한 채 살인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는 최근작 <컬러 오브 나이트>에서도 재현되었다.

영화가 끝나자 참석자 10여 명이 영화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먼저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영화 담당 간사인 영화 평론가 변재란씨가 <드레스 투 킬>에서 어떤 점을 주목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영화 속 훔쳐보기 대상은 언제나 여자

그는 “팔머가 히치콕보다 더 관음주의에 집착하고 있다”면서 팔머의 다른 공포 영화 <캐리>와 마찬가지로 본래 줄거리와 상관없이 영화가 벌거벗은 여자로부터 시작된다거나, 여성 신체의 특정 부분을 클로즈업하고 있으며, 살인 도구로 등장하는 면도용 칼은 남성의 거세 공포를 자극하는 상징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영화에서는, 성의 억압 ·관음증 ·거세 공포 등을 주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참석자는 “80년대에 미국 남성들이 가지고 있던 성적 아이덴티티의 위기 의식이 반영된 느낌이다. 히치콕 영화들은 여성에 대한 집착으로 마마보이 같은 심리가 강했는데, 팔머 영화는 남성·여성에 대한 혐오를 동시에 표출한다. 여성의 이름으로 살해하는 것을 볼 때, 남성의 폭력은 싫어하면서 여성의 폭력으로 도망가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가, 여성들의 위협 때문에 억압 받는 남성들의 폭력성, 오랫동안 숨쉬기 편했던 공기를 버려야 하는 억압을 대변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변재란씨는, 남편에게서 성적 불만을 느끼고 박물관에서 만난 남자와 외도를 하는 리즈(엘리어트의 첫 번째 희생자)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어버리고, 관계한 남자가 성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소녀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든지 하는 따위의 확실한 징벌을 받고 있는데, 이는 남성 중심적 사고 방식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영화에서 훔쳐 보기(관음증)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남자이고 그 대상은 항상 여자라는 사실, 그러한 시선의 조직화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토론 과정을 거치자 단순한 스릴러물에 불과했던 <드레스 투 킬>은 그 안에 사회의 온갖 억압 구조며 병리적 현상을 반영한, 전혀 새로운 영화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를 남성 평론가의 눈이 아니라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물음은 사실상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다. 관객 나름의 잣대를 적용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세계 영화사가 다른 범주들과 마찬가지로 남성 위주의 틀에 의해 구성되었다면, 이제 전혀 다른 각도에서 영화사를 다시 읽을 수 있다는 인식의 확산, 바로 그것이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의‘여성의 눈으로 본 세계 영화사’ 프로그램은 바로 이러한 인식을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제1기에서 초기 영화와 미국의 장르 영화, 30년대 프랑스 영화를 살펴보았고, 제2기에서 히치콕·네오리얼리즘·베르히만을 다루었다. 지난 3월에 끝난 제3기에서는 프랑스 누벨바그와 동유럽권·아시아 영화를 다루었고, 현재 진행중인 제4기에서는 베트남전쟁에서 레이건까지의 미국 영화, 그리고 영국 및 제3세계 영화를 다루고 있다.

시네-페미니즘은 또 하나의 시민운동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델마와 루이스>처럼 페미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영화만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주목 받았던 영화 가운데 기존의 평론이 놓쳤던 부분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여성문화예술기획 이혜경 대표는 “여성의 눈으로 문화를 보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강조해야 할 것은 시민운동·문화운동적 방법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이다. 이 프로그램은 어떠한 지배적 논리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코드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억압적이지 않게 문화 참여를 강조하는 중요한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변재란씨도 “꼭 페미니즘만을 강조하거나, 페미니즘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에는 이러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자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68년 이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아카데미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없었던 영화이론에 씩씩하게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항 영화로서의 여성 영화’라는 선언문을 발표한 클래르 존스턴이나,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시네마’를 쓴 로라 멀비는 최초의 전사들이었다.

그로부터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이제 시네-페미니즘은 관객에게는 물론이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지나칠 수 없는 이론 틀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영화의 풍요 뒤에 있는 시네-페미니즘의 공헌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최근 공개된 박철수 감독의 <301·302> 같은 영화가 한국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명확한 반증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