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투신 자살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르
  • 파리·박철화 (문학 평론가) ()
  • 승인 1995.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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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마침표, 사유는 늘임표
“사상계에 벼락과도 같은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는 들뢰즈라는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이 세기는 들뢰즈의 것이 될 것이다.” 이 단정적인 말은 미셸 푸코의 것이다. 이제는 이 말의 주인공들 모두, 그들이 열어 놓은 문 너머로 사라졌다. 지난 11월4일, 들뢰즈는 파리의 아파트에서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삶을 마쳤다. 파리에서 25년 1월18일에 작동을 시작한 그의 기계는 70년을 조금 넘기고는 더 이상 움직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던 미셸 푸코처럼, 이미 고정된 세상의 모든 질서에 가장 힘있게 ‘아니오’라고 대답하며 새로운 문을 열고자 했던 들뢰즈의 마지막 몸짓은, 이처럼 역시 ‘아니오’였다. 오랫동안 호흡기 계통 질환에 시달렸다고 알려진 이 철학자의 마지막 반항인 자발적인 죽음은, 그렇다면 그가 늘 강조하기를 잊지 않았던 ‘삶에 대한 의지’와는 모순될 결말인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살기를 강요함으로써 죽음의 휘장을 둘러치던 육체적 인간 조건에 대한, 역설적인 의미에서의 반항이었다. 육체로서의 기계를 멈춤으로써 그의 사유에 움직임의 길을 터준 것이다. 그것도 80년대 이후 가장 힘찬 움직임에 말이다.

푸코·가타리와 만나며 사상적 경험 확대

그는 온갖 철학의 물결이 넘나든 현대 프랑스의 사상계 안에서도 가장 독특한 인물이다. 마르크스주의·정신분석학·현상학· 구조주의 등등 그 어떤 울타리 안에도 그를 묶어둘 자리는 없다. 그는 그것들의 ‘바깥에서’ 또는 그것들의 ‘사이를’ 오가는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를 분류할 수 있다면, 단지 미셸 푸코와 함께 헤겔의 총체성에 반대하기 시작한 최초의 프랑스 철학자라는 딱지뿐이다. 헤겔의 이론을 수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사르트르를 정점으로 하는 그의 윗세대와 갈라진다.

오히려 그는, 바타이유·블랑쇼·클로소프스키·푸코·데리다 등과 함께 헤겔과는 가장 극단의 대척점에 서있는 ‘차라투스트라의 조카’, 그것도 가장 뛰어난 조카인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철학자로서 성숙할 초창기인 60년대에 <니체의 철학>(62)을 내놓은 사실은 우연이나 유행의 결과가 아니다. 그에게 니체는 ‘영원히 회귀할’고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들뢰즈가 니체의 품 안에만 머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유목민답게, 근대 철학의 주요한 오아시스를 다 거쳐 간다.

44년 파리 대학에서 시작된 그의 철학 수업은 장 이폴리트, 조르주 캉기렘 등과 사제 관계를 맺어 주었으며, 철학을 가르치는 일로 그를 이끌었다. 48년 교수 자격 시험을 통과한 뒤 잠시 고등학교에 머문 그는, 57년 소르본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 리용 대학 교수를 거쳐, 저 찬란한 뱅센 실험대학, 즉 파리 8대학에 자리잡았다. 69년부터 87년에 정년으로 교수 자리를 떠나기까지 그는 이곳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상징이었다.

그 사이 그의 철학 여정에는 두 가지 주요한 장면이 있다. 하나는 62년 미셸 푸코와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펠릭스 가타리와의 악수이다. 푸코의 거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시작된 첫 번째 만남은, 푸코가 파리 8대학 철학과를 맡으며 들뢰즈를 데려오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당시까지 학자의 제복 아래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자제하고 있던 들뢰즈로 하여금 스스로의 색깔을 만들어내도록 부추기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들뢰즈는 푸코가 죽은 2년 뒤에 <푸코>(86)를 통해 가장 강력하게 친구를 되불러내는 것으로 그와의 우정을 간직했다.

가타리와의 만남은, 제도화한 지식이란 무엇인가를 파헤치는 모험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욕망의 기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 짧게는 정신 분석, 특히 프로이디즘의 가족환원주의를 부수며, 넓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휴머니즘이라는 외피를 입고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시선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려고 애썼다. 들뢰즈에게 가장 독특하고 유일한 철학 정신이라는 명성을 안겨준 <앙티 오이디푸스>(72) 라는 반항아의 모습은, 젊은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정신분석의였던 가타리와의 합성물이다.

세상의 질서에 ‘부정’의 정신으로 맞서

이상 두 번의 만남을 고려하고 살피면, 들뢰즈라는 사유의 움직임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철학사의 봉우리를 등반하며 자신의 목청을 가다듬던 68년까지의 학자 얼굴, 그리고는 69년 거의 동시에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 등을 선보이며, 언어와 문학을 철학 자체의 화두로 올려놓고 새로운 개념과 의미로 사유에 다른 길을 트려 애쓰는, 창조하는 철학자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70년 이후 가타리와 함께 언어의 배를 타고 삶과 지식의 모든 가성을 향해 ‘바깥’ 모험을 떠나곤 하던 고독한 항해자의 얼굴이다.

그 모험 끝에 들뢰즈는 육체라는 욕망의 시스템 바깥으로 스스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곳곳에서 작동을 멈추지 않고 더욱 활발하게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 스스로 이야기한 사유인의 모습이 아닌가. 그의 삶의 에너지는 그래서 들뢰즈를 철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고, 미술 <프란시스 베이컨-감각의 논리>(81), 영화 <이미지-운동>(83), <이미지-시간>(85), 그리고 음악과 연극 등으로도 넘나들게 만든다.

마르크스주의를 버리지 않았고, 68년 5월 혁명의 정신을 끝까지 간직한 들뢰즈는, 특히 베르나르 앙리·레비를 중심으로 모인 신철학자들을 혐오했다. 그들은 <철학이란 무엇인가?>(91)라는 사유와의 어려운 싸움을 멈추고, ‘정지’의 노예 세계에 안주하며, 선전, 즉 미디어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세상의 질서에 ‘부정’의 정신으로 끝까지 맞선 들뢰즈라는 기계는, 바로 그렇게 괴어 썩는 이원론의 정태적 사고를 제어하며, 삶의 가능성에, 새로움의 생성이라는 기쁨에, 우리의 창조성에 ‘예’라고 긍정하기 위해 ‘도처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메아리로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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