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문화]저자 사인이 책의 운명 바뀐다
  • 파리·고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7.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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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사인회’의 역사와 영향과 에피소드
흔히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저자 사인회가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지도 오래다. 저자 사인회는 독자들에게 저자의 서명이 담긴 책을 간직하게 하는 기쁨을 준다. 그런 책을 사서 읽는 독자는 마치 친근한 사람이 쓴 책을 읽고 있다는 환상을 갖는다. 그것이 저자 사인회가 노리는 것 중 하나이다.

물론 아무 작가나 사인회를 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가 저자 사인회를 한다고 해 봐야 독자들이 관심을 보일 리 없다. 어떤 작가가 사인회를 한다는 것은 그가, 좋은 작가이건 아니건, 잘 팔리는 작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인회는 판매를 촉진하지만, 그 사인회를 촉진하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확인된 판매 부수(또는 가능성)이다.

책에 대한 숭앙이 우리나라 못지 않은 프랑스에서도 저자 사인회의 관습은 뿌리 깊다. 우리나라보다 더하다. 그리고 사인회의 주인공은 단지 소설가만이 아니라 평론가·철학자·사회과학자에 이르기까지 더 넓게 퍼져 있다.

‘책의 서명·증정’을 최근호의 특집으로 꾸민 프랑스의 월간 독서 정보지 <리르>에 따르면, 대체로 서점이나 도서전시회에서 열리는 저자 사인회는 글자 그대로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디디에 드쿠앵이라는 작가는 젊은 시절 그 저자 사인회에서 뒷날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만났다. 작가에 따라서는 저자 사인회에서 마음에 드는 여성, 또는 남성에게 그 책을 서명할 때 여백에 은밀히 자기 전화 번호를 적어 놓기도 한다.

낯선 사람에게 책을 서명·증정하는 저자 사인회라는 형식은 20세기적 풍속이라고 하더라도, 저자가 자기 책에 서명을 해서 특정한 독자에게 증정하는 습관은 인쇄술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인쇄술의 초창기에는 텍스트의 저자가 아니라 인쇄인이 특정 서적의 창조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인쇄인이 서명을 해 자기가 아는 독자에게 책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서명자가 인쇄인이건 작가건 그 당시의 증정사는 ‘아무개가 아무개씨에게’ 하는 식으로 밋밋하고 간결한 것이었다. 증정사가 ‘내 천사에게’ ‘내 사랑에게’ ‘내 구원의 여신에게’ 하는 식의 은밀하고 사적인 내용으로 바뀐 것은 19세기 들어서다.

희귀본의 값을 결정하는 것은 그 책이 초판본인가 아닌가, 장정 상태는 어떠한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소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겠지만, 책에 따라서는 저자의 서명 여부도 한몫을 한다. 물론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서명이 아니라, 서명한 사람과 책을 증정받은 사람의 유명도이다. 그때의 서명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니까.

‘외젠 들라크루아에게, 영원한 존경을 담아’라는 증정사가 담긴 <악의 꽃>의 초판본(1857)은 85년 1백30만프랑(약 2억1천만원)에 팔렸다. 이 거래에서 값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 책이 보들레르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화가 들라크루아에게 증정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책의 다른 초판본들의 시가는 그 10분의 1 이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스승에게’라는 증정사를 담아 빅토르 위고에게 보낸 <마담 보바리>의 시가는 60만프랑이다.
그보다 한 자리 수 아래로는 장 콕토가 마들렌 르노·장 루이 바로 부부에게 보낸 <해룡(海龍)> (5만프랑), ‘젊은 스승에게 늙은 제자가 존경을 담아’라는 증정사가 실린 샤토브리앙의 <로마 제국의 쇠퇴에 대한 연구>(3만8천프랑, 역사학자 오귀스탱 티에리에게 증정) 등이 있다. 다시 그보다 한 자리 수 아래로는 시인 폴 베를렌이 샤를 몽슬레에게 증정한 <사투르누스 시집>(5천프랑), 장 폴 사르트르가 미셸 보른에게 증정한 <알토나의 유폐자> (1천3백프랑) 따위가 있다.

서명·증정 받은 덕분에 시인 된 필립 수포

책의 서명·증정이 문학사 연구의 실마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에밀 졸라는 1893년 6월 그의 <루공­마카르> 총서 마지막 권을 자기 정부(情婦)에게 보내면서 ‘내 사랑하는 잔에게, 내게 젊음의 열락을 주고 나를 30년은 젊게 한 클로틸드에게’라는 증정사를 썼는데, 이것은 졸라의 개인사를 밝히는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파스칼 박사의 연애 사건이 누구를 모델로 했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서명·증정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은 경우도 있다. 1917년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기욤 아폴리네르는 그의 시집 <알콜>을 젊은 시인 지망생 필립 수포에게 보내면서 ‘시인 필립 수포에게 삼가 드림’이라는 증정사를 썼다. 이 증정사는 수포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뒷날 수포는 자기가 숭배하던 아폴리네르가 자기를 시인으로 불러주었기 때문에 시인이 될 자신이 생겼고, 그것으로서 자기 인생은 결정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서명·증정의 주된 대상은 아주 가까운 친지들을 빼면 주로 언론사의 책 담당 기자들, 평론가들, 문학상의 심사위원들이다. 그들이 책의 판매·성가·문학상 수상 여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문학사가들은 발자크나 네르발이나 플로베르처럼 당대를 풍미했던 문필가들이 서명·증정을 위해 스스로 작성한 기자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 개중에는 책을 보낸 뒤 그 책이 기사화되었는지 아닌지를 기자 이름 뒤에 꼼꼼히 기록해 놓은 사람도 있다. 대중이 문학의 지배적인 수요자로 떠오르기 전 작가들이 한 사람의 후원자(주로 왕족이나 귀족)에게 책을 헌정하고 그 후원자로부터 부와 명예를 보장받았듯, 현대의 작가들도 판촉과 명성을 위해 잠재적 후원자인 대중에게 책을 서명·증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명 행위를 꼭 적극적인 ‘구애 행위’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미움 받지 않기 위한 소극적 자구 행위일 수도 있다. 실제로 프랑스의 저명한 문학상을 단골로 심사하는 문학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서명·증정되어 올 만한 책이 오지 않으면 출판사에 전화해 불같이 화를 낸다고 <리르>는 전한다. 그러니 콩쿠르상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던 소설가 쥘리앵 그라크처럼 서명·증정이라는 관행을 송두리째 무시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작가들은 아주 드물 수밖에 없다.

“증정사가 책을 예술 작품으로 만든다”

또 문학과 무관한 사람일지라도 단지 그가 거물이라는 이유로 책을 증정받는 경우가 있다. 90년 네베르라는 도시에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이 개관되었을 때 미테랑 대통령은 그 도서관에 자기의 책 5천5백권을 기증했는데, 그 책들에는 모두 저자의 서명이 되어 있다. 책을 증정한 작가 중에는 미테랑의 철자를 틀리게 쓴 사람도 있어서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r가 둘인 미테랑의 철자에서 r 하나를 실수로 빠뜨린 텔레비전의 스타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본 텍스트 이외에 표제·각주·서문·발문·헌사·증정사 등 책을 이루는 이른바 ‘곁다리 텍스트’의 의미를 세밀히 분석한 바 있는 문학사가 제라르 주네트는 <리르>와 가진 인터뷰에서 서명·증정에 대한 분석이 문학 연구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한 뒤, 자신은 서명·증정이 지니는 음습한 전략적 의미 때문에 그 관행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면서도, 결국은 이런 말로 인터뷰를 맺고 있다.

“오늘날 많은 작가가 단지 증정사만을 손으로 쓰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쇄된 텍스트에 직접 손으로 쓴 증정사와 서명은 작가의 존재론에 속한다. 오로지 그것만이 책에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공산품으로서의 책을 예술 작품으로서의 책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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