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최영준 <국토와 민족 생활사>
  • 이정만 교수 (서울대·지리학) ()
  • 승인 1997.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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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답사를 하게 되는 동기와 답사 방법, 그리고 답사에서 얻게 되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또한 답사에 모범 답안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읽으면서 ‘최교수가 답사를 참 잘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우리가 어렸을 때 고궁이나 왕릉 또는 산성(山城)에 소풍갔던 것이 답사의 시작일 것이다. 철 모르고 뛰어놀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소풍으로 알았었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장소에 얽힌 역사성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이다.

조금 더 성장하여 이름난 유적지에 갈 때마다 안내문을 자세히 읽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곳에 가기 전에 그 곳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읽고 그 장소에 얽힌 역사의 향기를 느끼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장소와 역사에 대한 호기심과 애착의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感想 또는 鑑賞)의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그 장소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의문점을 풀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책은 이렇듯 감상 차원에서 탐구 차원으로 호기심을 발전시키려는 사람(주말 학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이 책에서 저자가 연구 주제를 설정한 방식과 연구 방법을 차분히 관찰하면 두 배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즉,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여러 곳(또는 지역)에 관해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소중하거니와, 그러한 지식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배우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택리지> 관련 글, 우리나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

저자는 단순히 문헌 연구나 답사에 의존하지 않고 고지도(古地圖)와 현대 지도, 고문서, 촌로와의 면담, 사진, 그리고 지명까지 사용해 역사 지리적 관점의 입체성을 잘 살리고 있다. 물론 그 근저에는 저자의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우리 국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국토의 지리적 인식’에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 발달과 <택리지>에 대한 글이 담겨 있는데, 일반 독자는 현장을 발로 뛰며 쓴 2부와 3부를 먼저 본 다음에 1부를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이중환의 <택리지>(이 책은 의외로 쉽고 재미있다)에 관해 쓴 1부 2장은 우리 말로 번역된 <택리지>를 옆에 놓고 온 가족이 돌려 가며 읽으면 우리나라를 새로이 이해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제2부에는 ‘지역 개발: 하천·해안·산지’라는 제목으로 남한강의 수운(水運), 강화도의 경관(景觀) 변화, 지리산의 농경지와 취락에 관한 글 세 편을 싣고 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강, 관광지로 생각하는 강화도, 등산하러 가는 지리산에 이렇듯 독특하고 다양한 사람과 장소의 역사가 스며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제3부에는 ‘취락: 도시와 촌락의 경관’이라는 제목으로 서울 성곽 바깥 지역, 교통로 주변에 들어서는 노변 취락(路邊聚落), 우리의 고향 동족촌, 개항장 인천, 그리고 ㅁ자형 가옥에 대한 글을 실었다.

이 책은 저자가 20년 동안 연구한 논문 가운데 비교적 일반인들이 친숙하게 여길 수 있는 것들을 모았는데, 지나치게 어려운 전문 용어나 추상적인 개념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기본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전문가가 아니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잘 드러나는 심미적 정서가 거의 표현되지 않은 것인데, 이것은 원래 이 책에 실린 글들이 학술 논문으로 쓰인 것이어서 어쩔 수 없다.

역사와 지리가 함께 가면 과거가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의 삶은 개개인이 매일 어느 곳에선가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역사와 지리의 결합에 익숙해지면 우리 자신의 일상이 한 편 드라마같이 전개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굳이 멀리 돌아다니지 않아도 매일 재미있는 답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이 많은 사람에게 읽혀 하루하루의 삶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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