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한국 지식인이여 일어나라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8.02.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 교수들 ‘반성과 대안’ 쏟아내…학술단체 ‘공동 토론회’ 활발
방학을 맞아 텅빈 캠퍼스. 교수 연구동은 거의 불이 꺼져 있었다. IMF 구제 금융 이후 불면증에 시달리는 송호근 교수(서울대·사회학)는 땅거미가 지고 있는 대학 구내를 가로질러 연구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긴 겨울 동안 석유와 생필품은 제대로 공급될 것인가, 내년 봄에는 학교가 문을 열 수 있을까, 추위와 공포에 지친 선량한 시민들이 폭도로 변할 가능성은 없나 …. ’

최근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송호근 교수의 <또 하나의 기적을 향한 짧은 시련>(나남출판) 머리말의 한 대목이다. 머리말은 이어진다. 송교수는 어둠이 깔린 연구실에 들어가 불을 켠 다음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라고 자문한다. 89년 세계 사회과학의 대실패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것처럼, 국가 부도 위기를 예측하기는커녕 대처 방안조차 마련하지 못한 한국 사회과학의 대실패를 자인한 것이다.

곧 서점에 나올 계간지들을 미리 읽어 보면, 송호근 교수의 고뇌는 한국 지식인 사회의 ‘반성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문학과 사회> <현대사상> 등 계간지는 물론이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와 ‘한국 학술단체 협의회’(학단협)는 학문 정책의 기본 방향을 주제로 공동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현주소를 돌아보고 있다. 지식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금·여기에서 필요한 지식인은 과연 누구인가. 이것이 한국 지식인 사회에 던져진 화두이다.

최원식 교수(인하대·국문학·<창작과 비평> 주간)는 지식인 사회를 하루빨리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교수는, 창간 10주년을 맞는 <문학과 사회> 봄호 특집에서 한국 지식인 사회가 적막강산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개발 독재 체제와 끈질기게 투쟁하는 과정에서 영웅적 지식인 사회를 보존·발전시켜 왔는데 이 공황의 와중에 둘러보니 ‘혁명적 지식인’들은 온데간데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예찬하던 온갖 ‘포스트주의 지식인’들 또한 IMF 관리 체제에 직면해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과연 죽었는가

최교수는 지식인이 ‘자기 비판’할 용기가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제안한다. 최교수는 한국 지식인의 계보를 거슬러올라가면서, 한국 근대 지식인 사회가 겉으로는 중세에 반대하면서도 전통 사회의 사대부적 체질을 온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근대 지식인은 권력 지향적이었다는 것이다. 최교수는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론을 인용하면서, 새로운 지식인은 기술지식인(작은 배움)의 투항과 인텔리겐치아(큰 배움)의 혁명 사이를 가로지르는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매듭지었다.

송호근 교수가 작금의 사태를 통과하는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최원식 교수가 새로운 지식인 상을 위한 나침반을 보여주었다면, 소장 사회학자 김성기씨(<현대사상> 주간)와 김상환 교수(서울대·철학), 정수복씨(크리스찬아카데미 기획연구실장·사회학)는 각각 마르크스주의, 허무주의와 해체론, 대안적 발전 모델 등의 관점에서 지식인들이 끌어안아야 할 주제를 제출했다.

김성기씨는 <문학과 사회> 특집에 발표한 <마르크스주의는 과연 죽었는가:반시대적 고찰>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지적 정직성의 표현이 되고 만 시대에 ‘우리 삶의 현실이 대안적 삶의 질서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의 상황인가’라고 캐묻는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실패가 마르크스주의가 지향한 인간 해방의 대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김씨는 마르크스주의와 실사구시를 결합한다. 즉 실사구시로서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만이 우리 지식인 문화에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과거 독재에 맞서 싸운 지식인들이 새로운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과정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진단하면서, 자유주의에 투항하는 것과 냉소주의를 경계했다. ‘절대 권력과 상품 지배라는 이중의 비인간성에 대항해 인간 주체를 옹호하는 민주주의를 구상’하는 데에서 지식인은 존재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김상환 교수는 해체론의 관점에서 허무주의 시대를 초월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문학과 사회> 특집에서 김교수는 해체론이 허무주의를 불러낸 것이 아니라 허무주의가 해체론을 호출했다고 규정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해체론을 해체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 길이 허무를 인정하면서 허무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판단이다.

니체에서 데리다로 이어지는 해체론의 계보에서 미래지향적 허무주의를 발견하는 김교수는, 니체의 ‘신의 죽음’은 어떤 신학적·인간학적 명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신적인 것’으로 지칭되어온 초감성적인 것(이성)이 감성적인 것(해체론 혹은 예술)에 대해 행사해 오던 지배력을 거부하는 초월론적 명제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해체론은 서양 합리주의 전통을 극복하면서 미래를 내다본다.

김교수에 따르면, 플라톤 이래 서양의 형이상학과 신학이 추구해온 초월은 능가·초과·과잉·잉여 등 상향적 초월이었다. 그러나 ‘해체론적 초월은 하향적 초월’이다. 낮은 곳, 저급하고 미미한 것, 무에 가깝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에서 초월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초월은 서양 철학이 경험하지 못한 ‘결여적 초월태’여서 동양의 노자에서 찾아진다. 무위하되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노자의 ‘무불위(無不爲)’는 수동적 허무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무불위는 ‘인위적 법률의 범주를 벗어나되 모든 법률적 행위에 명령하는 힘을 가진 무불위의 행위’라고 김교수는 결론지었다.
“한국 학문, 조선 시대보다 낙후”

변방의 한구석에서 현재와는 다른 사회 구성의 원리를 모색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대안적 세력을 지식인 집단이라고 규정하는 정수복씨는, <현대사상> 특집 ‘부도 난 시대의 학문, 지식인-절망과 희망 사이’에 실은 글에서 87년 6월 항쟁 이후 오늘에 이르는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명명한 다음, 외국 유학·박사 학위·대학 교수라는 규격화한 틀에 편입되어 있는 한국 지식인 사회를 비판하고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즐거운 유배자’로서의 지식인을 옹호했다.

정씨는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 발전 모델을 제시하는 일이 오늘날 지식인의 책무라고 정의한다. 정씨는 당면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환경, 민주주의 심화, 평화와 통일, 복지, 교육, 문화, 여성 등 삶의 질과 관련한 영역을 새로운 사회 발전 모델의 주요 부분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식인의 역할은 인간중심적 인식 체계를 생태중심으로 전환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민교협과 학단협이 지난 2월17일 오후 서울 사간동 한국출판문화회관에서 개최한 공동 토론회는 새 정부에 대한 긴급 제안이다. 토론회에 앞서 두 단체가 발표한 건의서 <21세기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한 학문 정책의 기본 방향>(대표 작성자 강내희·유초하 교수)은 먼저, 오늘의 위기가 학문의 위기, 더 크게는 문화의 위기에서 말미암았다고 지적했다.

건의서는, 세계 각국에서 그 나라 학문이 차지하는 상대적 지위와 비교할 때 현재 한국에서 학문은 조선 시대보다 낙후해 있다고 지적했다. 학문이 사회 발전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지 못해 왔기 때문에 IMF 관리 체제라는 전례 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건의서는 현재의 위기가 경제만의 위기가 아니라 총체적 위기, 특히 문화의 위기라고 파악하고, 학문 정책을 새로이 인식해 미래를 열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서 처음 수립된 학문 정책인 이 건의서는 무엇보다 기초 학문의 중요성을 학문 정책의 맨 앞에 올려놓았다. 기초 학문에 바탕을 두지 않은 첨단 기술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 실정에서 보기에 응용 학문보다 기초 학문의 경쟁력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두 단체는 대통령 산하에 학문정책위원회를 설치해 학문 정책을 통합 관리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건의서는 미국·프랑스·일본 등은 80년대부터 학문 정책을 국가 주요 정책에 올려놓고 있다고 밝혔다. 건의서는 이밖에도 학문이 민주주의·생산성·도덕성·민족사의 부흥을 지향해야 한다는 정책의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고, 대학 구조 조정, 비제도권 학자 지원, 차세대 학자 육성 방안 등을 제시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