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한국화가 허 진, 네 번째 개인전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8.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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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허 진 개인전/독창적 형식·내용으로 현대인의 내면 묘사
한국화가 허 진씨(36·전남대 미술학과 교수)의 개인전(11월18∼25일·예술의전당 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는 이들은 두 번 놀란다. 먼저, 한국화에 대한 고정 관념이 깨진다. 한국화에서 절제된 양식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산수, 그 풍경에 녹아 있는 고도의 정신을 보려 했던 이들이라면, 그 기대감은 허씨의 작품을 접하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다음은 형식이다. 그의 작품은 한지에 수묵 채색이라는 한국화의 일반적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한국화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취한다. 적게는 네 점, 많게는 열여덟 점이나 되는 작품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다, 그 안에 담긴 내용들도 낯설기 짝이 없다. 형식과 내용 모두 한국화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것이다.

한국화의 고정된 틀이 너무 답답하고 재미가 없었다는 허씨는, 지난 88년 첫 번째 개인전에서부터 한국화라는 틀에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내용을 담아 왔다. 네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회에서 그가 작품 속에 담은 내용은, ‘익명 인간’이라는 주제로 묘사한, 부유하는 현대인의 초상과 내면 풍경이다.

<익명 인간-현대 십장생도>라는 작품은, 그 규모에서부터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가로 122㎝, 세로 244㎝에 이르는 작품 10개가 모여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이룬다. 각 작품은 따로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작은 단서들을 통해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한 인생이 ‘현대’라는 세상에 ‘입장’해서 ‘퇴장’할 때까지의 과정이 10폭의 작품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있는 것이다.

허 진씨가 자화상으로 표현한 익명 인간의 표정은 외롭고 쓸쓸하다. 익명 인간의 주변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펼쳐지기도 하고, 비행기·도로 표지판·생수통 같은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여러 이미지들이 자연을 둘러싸고 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갈길을 몰라 방황하고, 인간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진다.

허 진씨의 작품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단편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익명성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익명 인간의 내면에 이같은 풍경이 담겨 있다는 점을 다양하게 펼쳐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 풍경에서는 자연과 현대 문명의 부산물들이 어지럽게 교차되고 있다.

한국화의 표현 영역을 확대하고 싶다는 허씨는, ‘문명 비판’ ‘현대 사회 비판’ 같은 내용을 주제로 실험적인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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