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1주기 맞은 소설가 김소진
  • 魯順同 기자 ()
  • 승인 1998.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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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소진 1주기/문우들, 유고 산문집 <아버지의 미소> 펴내
‘한자 한 줄도 더하거나 뺄 데가 없이 꽉 짜인 단편으로 밑공부를 다진 다음, 중편의 언덕을 넘어 이제 막 장편과 대하의 태산 준령으로 올라서려던 판에 이 뉘를 버렸으니, 무엇이 그다지도 급했다는 말인가.’ 지난해 소설가 김소진이 서른다섯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소설가 김성동은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적었다. 그로부터 어느새 1년이 지났다.

4월22일 용인공원묘역 63번지 5­310 ‘작가 김소진의 묘’ 앞. 산 자의 과도한 애통이 죽은 자의 안식을 방해한다는 말이 있지만, 재능 있고 마음이 맑았던 사람의 빈 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설가 최인호 성석제 은희경을 비롯한 지인 40여 명이 묘소를 찾았고, 김소진이 5년 동안 근무했던 한겨레신문사 선후배 기자들은 애절한 추모의 글을 준비했다.

우리 말글 소설 속에 되살리려 애써

절친한 문우였던 시인 안찬수는 추도시를 지었다. 1년 전 ‘고아떤 리얼리스트여/차마 너를 위한 弔詩는 못 쓰겠다/씌어지질 않는다’라고 썼던 그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이 지났구나/너는 어느만큼 썩어 가고 있느냐/어느만큼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있느냐/용서하게나, 살덩어리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뼈만 남아 있는 네 모습을 떠올리는 나를/용서하게나,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네가 남겨 놓은 글들을 뒤적이게 되는 나를’이라고 1주기 추도시를 읊었다. 문학 평론가 염무웅씨는 김소진의 아내 함정임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소진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그의 ‘때 이른 배신’을 제대로 갚는 것이라고 함씨를 독려했다.

90년대에 등단해, 가장 90년대답지 않은 작품을 썼던 고집 센 작가 김소진. 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쥐잡기>가 당선되어 등단한 그는 당선 소감에서 ‘늦깎이가 되리라던 내 꿈은 무너졌다. 서른다섯쯤, 문리에 밝고 밑천 두둑한 장사꾼처럼 성큼 나서고 싶다’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 나이가 되자 그는 세상을 등졌다. 입원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젊은 작가치고는 드물게 토속어를 되살리는 데 열심이었고, 밑바닥 인생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고아떤 뺑덕어멈> <장석조네 사람들>에서 보인 우리 말글에 대한 애착, 미아리 산동네의 ‘양아치와 밥풀때기’에 대한 관심은, 발랄한 감각을 무기로 등장한 신세대 작가 일색이던 90년대 문단을 풍요하게 만들었다. 여린 듯하지만 모질고 고통스런 삶에 대해 끝끝내 긍정적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고집 센 작가의 활약을 기대하던 이들에게 그의 죽음은 너무도 허망했다. 문우들은 급히 그의 유고 소설집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를 묶었고, 이어 1년 만에 산문집 <아버지의 미소>를 세상에 내놓았다.
“나의 아버지는 개흘레꾼이었다”

<아버지의 미소>(솔출판사)에는 그의 체취를 느끼게 하는 글이 가득하다. 84년 대학 다닐 때부터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쓴 산문과 습작 소설, 대담 등이 김소진의 면모와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제목 ‘아버지의 미소’는 그의 화두가 ‘아버지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였다는 것을 일러 준다. 그는 아버지가 지극한 그리움의 대상이면서도 천길 나락의 캄캄한 지옥이었다고 쓰고 있다. 소년 시절 친구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알아볼까 봐 노심초사하던 김소진은 학교 운동장에서, 시장통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0.7평짜리 옹색한 구멍가게 앞에서 아버지를 세 번 부정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알아채고도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띄울 뿐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소설에서 묘사한 아버지의 모습은 새로운 아버지상으로 평가받았다. 이전의 작가들이 ‘아비는 종이었다’ 혹은 ‘아비는 남로당원이었다’라고 선언한 데 비해 김소진은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라고 고백했다. ‘종’과 ‘남로당원’은 신분이나 이념의 한계에 맞서 싸우거나, 그 굴레에 갇혀 몰락하는 비극적 이미지를 갖는다. 그에 비해 김소진이 그려낸 개흘레꾼 아버지는 이도저도 아닌 초라한 가난뱅이일 뿐이다. 단편 <춘하 돌아오다> <자전거 도둑>에는 못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작가는 이들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예를 들어 ‘0.7평짜리 구멍가게에서 낡고 허술한 천장에 게릴라처럼 출몰해 오던 새앙쥐들과 고투를 벌이곤 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데뷔작 <쥐잡기>에서 쥐와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의 모습과 겹친다.

그러나 그는 ‘법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권세 있는 아버지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아버지를 두었다는 게 사뭇 다행스럽다’는 인식에 이른다. 그리고 아들 태형을 보며 감회에 젖는다. ‘내가 지금까지 덧없이 아버지를 원망하고 눈물 흘리고 욕하고 그리워하는 사이에, 보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느덧 나를 아빠라고 부르며 재롱을 떠는 같은 DNA 계열의 존재가 생겨난 것이다.’ 그는 타계하기 겨우 4개월 전에 쓴 글에서 ‘요즘은 아버지의 그 희미한 미소를 거울을 통해서 다시 보게 된다’라고 썼다.

그렇게 김소진에게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를 일깨운 아들 태형은 어느덧 여섯 살이 되었다. 추도식장에서 제법 의젓하게 절을 올리기도 했다. 문우들은 추도식 끝에 이번에 출간된 그의 산문집 <아버지의 미소>와 아내의 소설집 <동행>을 묘 옆에 묻었다. 이로써 그가 쓴 글을 활자로 수습하는 일이 얼추 마무리된 셈이다.

아들의 절을 받고 느꺼웠을 김소진은, 자신의 산문집과 아내의 소설집을 옆구리에 묻은 채 말없이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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