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구촌 문화 전쟁에 출전 나팔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5.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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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대우·LG 등 영상·음반 분야서 야무진 첫 발
지난해부터 미국의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한국에서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되었다. 그가 감독해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쥐라기 공원>이 한국에서는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 충격은 영화의 내용에서만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쥐라기 공원> 한 편이 얻은 1년 수익이 한국 자동차를 1년간 수출한 수익과 맞먹는다는 사실이 청와대에 보고되었고, 그 보고의 파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1월18일 스티븐 스필버그가 한국을 방문한 일은, 자동차 수출 대수와의 비교라는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도 이제 세계 문화 전쟁에 참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다(96쪽 관련 기사 참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문화 전쟁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던 한국이 이제 그 전쟁에 뛰어들었음을 국내에 알리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지난 9월24일자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 몽드>는, 미국의 타임워너와 터너방송사(TBS)가 합병한 사실을 놓고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명했다. ‘음악과 영상 산업이 미국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19세기의 제국주의적 함포(艦砲)와 똑같은 것이다. 유럽이 여러 기술 수단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사오는 수밖에 없다.’
문화산업에 관한 한 미국의 국제 경쟁력을 따라잡을 국가는 없다.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과 팝 스타를 앞세운 미국 음반산업의 파상적 공격 앞에 손을 들지 않는 나라는 드물다. 한국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영화 직배사는 88~93년에 한국 시장에서 9백억4천여만원을 수익으로 챙겨갔다(<시사저널> 제317호 참조). 한국 대중 음악이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국내 시장 점유율을 50% 이상 유지하며 선전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언제 뒤집어질지 모른다.

미국의 문화 상품은 수십 년간 축적해온 노하우와 자본력, 그리고 튼튼한 배급망을 통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문화 상품은 지금 미국의 자존심이자 미국을 먹여 살리는 주요 재원이 되고 있다. 일본이 경제력을 앞세워 미국에 맞서려 하지만, ‘세가’와 ‘닌텐도’가 주도하는 게임기 시장을 제외하고는 미국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영상산업 주자는 전자업체와 ‘사촌간’

그러자 일본 기업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미국의 영화·음반사를 합병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기기 회사인 소니사는 베타 방식 VCR가 참패한 원인을,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의 부족에서 찾았다. 소니는 88년 5대 메이저 가운데 하나인 미국의 CBS레코드를 인수하고, 1년 뒤에는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해 소프트웨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와 ‘소니픽처스 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귀속된 두 회사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매출 비율을 50:50으로 끌어올리려는 소니의 원대한 계획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다.

다음은 일본 최대의 가전 생산업체인 마쓰시타였다. 90년 11월 마쓰시타는 유니버설 영화사를 보유한 MCA를 인수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소프트웨어 확보에 나섰으나, 결국 ‘미국인의 저력’에 굴복해 지난 4월 유니버설 영화사를 캐나다의 시그램사에 매각하고 말았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든 일본 기업이 실패한 본보기가 되고 만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두루 거쳐 할리우드 영화사의 지분이나 제작에 참여하는 일본 기업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제일제당이 스티븐 스필버그와 제프리 카젠버그, 음반 제작자 데이비드 게펜이 만든 세계 최고의 영상소프트회사 ‘드림웍스 SKG’와 합작을 추진하는가 하면,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영화 제작비 출자와 외화 수입을 통해 영상 소프트웨어산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영상 소프트웨어산업에 참여한 대기업들은 공통적으로 가전제품 생산업체를 끼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의 문화산업 참여는 일본의 소니나 마쓰시타처럼 삼성전자·현대전자·LG전자·대우전자 등 전자업체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대기업들은 ‘하드웨어를 판매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영상소프트웨어의 상품화에 초점을 맞추는 공격 전략으로 급선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성은 지난 11월2일 계열사에 흩어져 있던 영상·음반 관련 사업들을 ‘삼성영상사업단’이라는 기구에 집결시켰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등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던 소프트웨어 사업들을 한 지붕 아래로 불러들인 것이다. 삼성영상사업단측은 통합한 배경을 ‘영상과 음반의 정보 교류와 집중을 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 사람의 지시 아래 협동 작업을 하게 하면서 ‘1+1=2+α’라는 시너지 효과를 꾀한다는 것이다.

대우는 대우전자에 소속해 있는 영상 비디오 부문 4개 사업부를 그룹의 모기업인 주식회사 대우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주)대우로 이전하는 계획은, 삼성의 통합처럼 그룹 차원에서 영상사업 부문을 우선 순위에 둔다는, 영상산업에 대한 그룹의 높은 관심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대우전자측은 밝혔다.

LG는 93년 1월 일찌감치 (주)LG미디어를 설립해 영화·음반·이벤트사업을 다각도로 펼쳐오고 있다. 반면 94년 초 ‘CD비전’이라는 새로운 하드웨어와 함께 ‘비디오 CD’라는 소프트웨어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영상산업에 진출한 현대는 최근 현대전자, 금강기획, 그리고 케이블 채널 KMTV에 인력을 분산 배치해 소프트웨어사업에 본격 참여할 채비를 하고 있다.

금강기획은 최근 신규 사업팀을 구성해 영상산업 준비를 하고 있으며, KMTV는 음반 제작에 착수했다. 현대전자의 한 관계자는 “계열사마다 처지가 달라 당분간은 일을 따로 하겠지만, 이들은 내년 하반기쯤 종합사업단으로 묶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전자는 영상 음반사업 외에 전자게임사업에도 참여해 서울 동숭동에 ‘조이뱅크’라는 게임 플라자(오락실)를 시범 운영하면서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영상사업 ‘4인방’ 이어 두산·롯데·벽산·쌍용 가세

영상·음반·엔터테인먼트 산업에 투자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4개 그룹에 그치지 않는다. 선경은 SKC를 통해 음반·비디오 산업에 일찌감치 뛰어들었고, 두산은 오리콤을, 롯데는 대홍기획을 통해 음반을 제작하고 있다. 서울 중앙극장 소유주인 벽산그룹은 극장 사업에, 쌍용그룹은 게임 소프트웨어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종합상사인 주식회사 쌍용이 93년 말부터 시작한 게임 소프트웨어사업은, 국내 시장이 2백50억원 규모의 작은 시장인 데다 유통 구조가 바로 서지 않은 ‘초기 시장’인 탓에 지금은 1년 매출액 40억원 규모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게임 소프트웨어의 소비자 범위가 머지 않아 크게 확대될 것에 대비해 쌍용은 지난해 12월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 대기업으로서는 유일하게 PC 게임용 소프트웨어 유통센터인 ‘쌍용 소프트웨어 플라자’를 설치하고 시장의 급격한 확대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한국 대기업들의 영상 소프트웨어사업 참여는 일반 가정에 VCR가 보급되기 시작한 80년대 초 삼성·대우·선경이 홈 비디오 유통 사업에 참여해 비디오 판권을 사는 것으로 출발했다. 92년 삼성물산의 드림박스와 대우전자가 <결혼 이야기> <미스터 맘마>라는 한국 영화에 전액 혹은 부분 출자를 하면서 본격화한 대기업의 영상산업 투자는, 이후 다매체·다채널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맞으면서 경쟁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한국 영화에 대한 기업들의 제작비 투자는 95년에 이르러서는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최근 대우전자는 11월18일 개봉된 <전태일>의 제작비 전액을 우선 지원했고, 삼성은 <개 같은 날의 오후>에 제작비를 대는 등 연간 5편 이상의 영화에 제작비를 투입해 왔다. 두 회사가 경쟁적으로 제작비를 출자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영상 소프트웨어의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한 편은 극장뿐만 아니라 ‘수직 계열화’를 통해 다양한 창구로 판매된다. 먼저 영화 총매출액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비디오, 공중파와 케이블TV, LD, 비디오 CD, CD-i, 게임소프트웨어, 캐릭터 사업 등 영화를 기본 재료로 하는 여러 매체가 다양한 통로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LG미디어와 현대 계열사인 금강기획도 한국 영화 제작비 지원과 외화 수입을 통한 영상산업 분야에 참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의 영화 참여는 영화사 설립과 극장 인수로 이어진다. 영화사 설립 계획을 밝힌 대우전자는 지난 9월 서울 씨네하우스 극장을 매입했고, 2002년까지 전국 6대 도시에 복합관 성격의 영화관을 세울 계획이다.

삼성도 93년부터 서울 명보극장의 2개 관을 빌려 배급을 시작했고, 부산 등 대도시에 극장을 신축하고 있다. 현대는 이미 서울 압구정동 등에 영화관 부지를 마련하여 제작과 배급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다. 비디오 CD와 CD-i 등을 제작해 영상산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LG미디어도 극장 확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영화 제작비 지원과 외화 수입·배급을 통해 영상산업의 ‘재료’를 확보하려는 대기업들은 한결같이 ‘국내 시장만 겨냥해서는 대규모 자본을 투입할 이유가 없다’고 밝힌다. 평균 제작비가 10억원에 이르는 한국 영화만 하더라도, 국내 시장만으로 제작비를 되뽑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삼성, 佛·獨·英·日과 영화 합작·배급 준비
대기업들이 최근 눈을 돌리는 것은 외국 영화사와의 합작이다. 삼성영상사업단은 프랑스·독일·영국·일본과 합작해 <마담 버터플라이> 제작을 마치고 배급을 준비하고 있으며, 대우전자도 할리우드의 영화사와 합작으로 애니메이션을 준비하고 있다. 현대전자는 아직 영상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으나, 최근 애니메이션 제작업체인 대원동화·KBS와 함께 이원복 교수(덕성여대·만화가)의 <먼 나라 이웃 나라>를 만화영화화하는 데 선투자하기로 결정했다. LG미디어도 ‘외국의 메이저사들로부터 합작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밝혔다.

소프트웨어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한 대기업들의 사업은 본격화했지만, 외화 수입 과당 경쟁 같은 부작용과 함께 한국 영화의 제작비 지원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의 작품성보다는 최민수·최진실 같은 스타의 출연을 선호하는가 하면, 예컨대 코미디물이 성공하는 분위기라면 당장 돈이 되는 그 쪽으로만 투자를 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영화 기획사 (주)김가그림 대표 김경식씨는 “야구는 3할 타자면 잘하는 것이지만, 조직력과 자본을 갖춘 대기업이 참여하는 영화는 1할 타자면 족하다. 데이터를 통해보면 10편 중 1~2편만 잘 되어도 나머지 손실을 커버하고 남는다”라며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는 대기업들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소자본으로는 불가능한 배급과 제작비 출자는 대기업이 맡고, 거기에 대기업이 갖추지 못한 충무로의 창의력을 결합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라면서 “지금과 같은 근시안적인 방법으로는 대기업과 충무로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음반보다 영화 쪽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한국 대기업들의 문화산업 참여는 지금 막 걸음마를 뗀 단계이다. 영화 한 편에 대해 모든 권리를 가지고 수직 계열화를 이룬다 하더라도 비디오 CD 같은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는 아직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닥친 멀티 미디어 시대를 앞두고 기획력과 자본력을 무기로 삼아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세계 문화 전쟁에서 한국이 차지할 영토는 별로 넓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 대기업들이 성장해 오면서 보여 주었던 ‘독식’의 폐단이 이 분야에서도 나타난다면 백전백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LG미디어 이종헌 이사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영상산업에 참여하는 대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전문적 노하우를 가진 소규모 중소기업들이 수없이 많은데, 대기업이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다 제작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대기업은 자본의 효율적인 사용과 조직을 이용하는 마케팅 능력에서 힘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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