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한국 고대사, 역사의 빗장 푼다
  • 宋 俊 기자 ()
  • 승인 1998.10.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민족 뿌리 찾기 활발…‘열린 사관’ 갖춘 신진 학자들이 새 바람 주도
'민족 뿌리 찾기’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바야흐로 고대사 탐구의 불씨가 잉걸불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월 뗏목 ‘발해 1300호’로 고대의 동해 항로를 탐사하다 목숨을 바친 네 젊은이의 희생은 그 상징적 비문으로 읽힌다. 올해 말께는 이들의 취지를 기리는 2차 뗏목 탐사대가 ‘발해 1300호’의 뱃길을 되밝힐 준비를 하고 있다. 이 탐사는 역사 다큐멘터리 <발해 1300년>(가제·KBS)에 담겨 연말께 방영될 예정이다.

97년 8월 문을 연 ‘동이학교’(전북 정읍·교장 박문기)는 지난 8월 제5기 강좌를 성황리에 마쳤다. 3박4일 동안 고대사와 전통 사상, 민족 문화 등을 집중적으로 학습하는 ‘계절 학교’다. 고구려 천문 지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바탕으로 우리 고유의 별자리와 고대사를 비교 연구하는 ‘별을 찾는 사람들’(대장 이은화)의 활동도 활발하다.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는 지난 6월부터 14박15일 일정으로 ‘고구려·발해 유적지 학술 탐방단’을 운용하고 있다.

특히 두드러진 것은 저술·창작 활동이다. <고구려의 발견>(김용만) <금관의 비밀>(김병모) <새로 쓰는 백제사>(이도학) <실증 한단고기>(이일봉) <환단고기>(단학회 연구부·전3권) 등은 1년도 채 안된 신간 연구서들이다. 최근 2~3년 간 출간된 고대사 연구 서적만도 무려 20여 권에 이른다. 이인화의 소설 <초원의 향기>와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 시리즈도 서점가의 신간 코너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같은 고대사 탐구 붐은, 그동안 쌓아 온 학계의 성과가 대중을 향해 흘러넘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사료의 절대 빈곤에 허덕여 온 고대사 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지는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토록 오래 동면에 빠져 있던 고대사가 어떻게 짧은 기간에 기지개를 켤 수 있었을까. 가깝게는 북한의 자료가 개방되고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유입된 사료들이 결정적으로 공헌한 덕분이다. <단(丹)>(김정빈·84년)과 역사서 <한단고기(桓檀古記)>(임승국 역주·86년)가 일반인의 호기심을 단박에 불러일으킨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더욱 근본적인 변화 유인은 사대주의와 식민 사관을 극복한 신진 연구 세력의 출현이다. 역사학에 ‘제3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 30~40대 소장 연구자들은 90년대 들어 일반인을 겨냥한 ‘눈높이 저술’로 역사서 대중화 시대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들은 강단 사학과 재야 사학의 오랜 반목을 지양하며, 중국·일본의 패권주의 역사관에 당당히 맞서는 입장을 견지한다. “재야·강단 사학의 ‘역사 전쟁’은 무의미하다. 이제 역사 연구는 미래를 향한 국제적 ‘학술 전쟁’이며 ‘문화 전쟁’이다”라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환단고기> 출현으로 강단·재야 시각차 더욱 커져

이전까지만 해도 강단 사학과 재야 사학은 상대방을 ‘식민 사학’ ‘아마추어 사학’이라고 서로 경멸하는 상태였다. 재야 사학은 신채호·박은식·정인보 등(1세대)의 민족 사관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 광복 이후 안호상·이유립·임승국 등(2세대)이 활약했고, 80년대 초반 이후 이들의 강의를 들으며 역사 연구에 뛰어든 30~40대 소장 연구자(제3 세대)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강단 사학의 뿌리는 진단학회이다. 진단학회는,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와 그 친위대 격인 청구학회에 대항하여 만든 단체다. 일본 사학을 학습한 이들이 광복 후에 학교 강단을 독점하면서 강단 사학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인데, 진단학회의 주축인 이병도·신석호 등(1세대)이 청구학회 회원이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식민 사관 집행자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의 제자와, 이들이 마련한 역사관과 그 준거 및 사료들을 기초로 활동한 일련의 학자들이 2세대인 셈이다. 이들에게 배웠으면서도 민주화 투쟁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안목으로 역사를 읽기 시작한 일군의 소장 학자들이 3세대에 해당한다.

두 진영의 1·2세대간 갈등 가운데 가장 극렬한 대립은 75년 재야 사학계가 연합해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면서부터 비롯한다. 74년 개편된 국사 교과서가 고대사를 축소 왜곡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국사찾기협의회는 78년 10월 문교부를 상대로 ‘국사 바로잡기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가 여의치 않자 79년 11월 국회 청문회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국사편찬위원회 구성원이 전원 경질되었고, 83년 개편 교과서에 부분적이나마 단군 왕검의 고조선 개국과 백제의 해외 진출 사실이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교과서 내용이 개편되었을 뿐, 두 진영의 역할과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후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재야 사학계의 판도가 급변했다. 상당수가 세상을 떠난 데다가, 사회 변화를 외면한 연구자들이 ‘개인 연구실’ 수준으로 영락해 버린 것이다. 결국 사회 변화를 제대로 읽어낸 그룹과 조직력·자본을 갖춘 법인 단체들이 경쟁력을 갖추며 소장 학자들의 둥지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3세대 연구자들이 역사와 현실을 함께 아우르는 ‘열린 사관’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재야·강단 두 진영이 가장 치열하게 맞선 79년에 홀연히 나타난 역사서가 바로 <환단고기(桓檀古記)>였다. <환단고기>는 우리 상고사를 상술한 책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상고사는 환국 → 배달 → 조선으로 이어진다.

환국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의 강역 안에 비리국·수밀이국 등 12국을 거느렸다. 환국의 통치자가 바로 환인이다. 배달의 도읍은 신시, 태백산 신단수 아래다. 통치자는 환웅. 그 뒤를 이어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다스렸다.

환인·환웅·단군 왕검은 임금의 다른 말이다. <환단고기>는 환인 7대·환웅 18대·단군 왕검 47대, 도합 72대 임금의 이름과 치세 내역을 상세히 밝히면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상술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가 당시 비전되던 사서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한데 묶은 것으로 전해진다. <환단고기>가 등장하자 두 진영의 시각은 더 벌어지게 되었다. 역사상 전례 없는 대제국 모델을 바탕으로 재야 학계가 활발히 연구 실적을 발표하는 동안, 반대 진영에서는 <환단고기>의 출처에 의혹을 품고 위서(爲書) 여부를 쟁점화하는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 와중에도 강단·재야의 제3 세대는 서로의 입장에 근접해 가는 경향을 보였다. 세대·진영에 구애되지 않고,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학자도 많아졌다. “<환단고기>를 사서로 수용하지는 못하지만, 연구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단군 47대의 기록은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김용만)라거나 “사료가 100% 옳을 수도 없지만, 오류가 있다고 해서 전체를 부정하는 시각도 옳지 않다. 사료 가운데 연구 가치가 있는 부분을 취하면 족하다”(윤내현)라는 입장이 좋은 예다.

고대 한민족 영토 관련한 학설도 갖가지
이들은 적어도 △사대주의 사관·식민 사관 극복과 △역사 연구의 정의와 목적이라는 두 관점에서는 거의 완전한 동질성을 구축한 듯이 보인다. 예컨대 중국의 역사는 ‘통일 국가’를 중심으로 학습되는 반면, 한국사는 분단 시대를 중점으로 배우게 된다. ‘한(恨)의 민족’이라거나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민족성을 위축시키려는 일제 식민 사관의 의도라는 것이다.

교과서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식민 근성을 긁어내는 것은 물론, 연구자 자신이 중국 사료를 반(反)사대적으로 해석하는 자세도 강조된다. 이래저래 우리 사서가 무참히 사라져 버린 마당이니 중국의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중국 사학자가 자국에 유리하게 해석했을 가능성을 감안해 당시의 국제 정세와 역학 관계를 면밀히 검토해 행간을 읽어내자는 것이다.

‘다물(고토 수복)이 역사 연구의 모토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사회·문화·경제 차원의 긍정적 승화가 절실하다’는 입장도 일치한다. 역사 연구란 모름지기 사려 깊게 민족의 이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명제이다. 이같은 노력과 고대사 대중화 추세에 힘입어 국사 교과서도 고조선의 강역을 조금 넓혀 잡고 ‘한사군’을 ‘한의 일부 군현’으로 바꿔 표현하는 등 부분적인 개편을 계속해 왔다.

두 진영 사이에서 아직도 편차가 크게 남아 있는 쟁점은, 바로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위치·강역 문제와 민족의 직계 조상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혹은 동이족의 범주) 하는 부분이다. 특히 강역 문제는 그 변수가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다. 중복되는 지명이 혼란을 가중시키는 첫째 요인이다. 황허 유역·만주·한반도에 같은 지명이 부지기수인 데다, 시대에 따라 지명이 이동하거나 엉뚱한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요동’이 좋은 예다. ‘요(遼)’는 ‘머나먼(아득한)’이라는 뜻이므로, 요동은 ‘머나먼 동쪽 땅’을 이른다. 중국의 국경이 확대되면서 ‘요동’도 덩달아 이동했다는 설이다. 요동에 있는 강이 ‘요하’인데, 나중에는 요하 서쪽의 땅이 ‘요서’로 불리게 된다. 그런 요하가 고대사의 국경을 추정하는 주요 근거로 쓰이고 있다.

동이족의 범위 혹은 한민족의 직계 범주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도 강역이 어마어마하게 달라진다. ‘동이(東夷)’라는 개념도 여럿이다. 한족이 국경 동쪽과 동북쪽에 사는 민족을 싸잡아 부른 명칭(따라서 국경이 확대되면 ‘동이’의 개념도 변한다)이 동이인데, 옛 사서의 문맥에 따라 우리 민족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夷)’의 뜻도 변한다. 초기에는 ‘기쁘다’ ‘떳떳하다’였던 것이 후대에 ‘오랑캐’로 변질했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거란·돌궐·몽골·숙신족 들을 모두 아울러 동이에 포함한다면 고조선 등의 강역이 한없이 넓어지게 되는 것이고, 민족의 범위를 좁게 잡으면 그 반대가 된다. 이같은 변수를 종합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강역에 관한 설이 네 갈래로 정리된다(84쪽 지도 참조). 대략 강단 2세대→강단 3세대→재야 3세대→재야 2세대 순으로 강역을 넓게 잡는 경향이 엿보이는 것이다.

“거란·돌궐 등은 우리의 형제 민족”

여기에 한 가지 주장이 추가된다. 이른바 ‘삼국이 중국에 있었다’는 학설들이다. 나아가 중국이 본래 우리 터전이었다는 설, 고려가 한반도 밖에 있었다는 소수 설도 존재한다. 옛 기상 이변 기록을 분석한 기상 전문가도 있고, 고대의 천문 기록과 별자리 관찰 각도를 현대 천문학의 방법론으로 계산해 유사한 결론을 얻은 교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일단 유물·유적과 어긋난 만큼의 간극을 설명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 주장으로 무엇을 이루자는 것인가’라는 ‘사관’ 차원에서도 강단·재야 양측으로부터 외면받는 실정이다.

사단법인 한배달 박 현 학술위원은 우리 조상이 기마 민족이었다고 추정한다. 박위원에 따르면, 거란·돌궐·말갈·몽골·숙신·읍루 등 동아시아 여러 민족이 우리의 형제 종족이다. 고조선·고구려·발해는 우리 조상이 주도했던 기마 종족 대제국이었으며, 요는 거란족이 주도한 경우고, 금·청은 여진족이 주도한 경우다.

고려 때 이런 형제 종족 개념이 깨졌다. 거란을 발해의 원수라 해서 적대시하고 문화 수준이 낮다고 업신여기며 이민족인 송과 친교한 것이, 기마 형제족들과 멀어지는 첫걸음이었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한족의 문명을 사대하기 시작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판단이다.

이같은 박씨의 가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포석이다. 형제 종족들이 지금은 비록 몇백만 명 단위의 중국내 소수 민족이 되어 있지만, 역사의 동질성을 복원한다면 하다못해 경제적 동반자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하지 않겠느냐는 구상이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고구려의 힘’이 군사력보다 ‘드높은 정신’에 있었다고 파악한다. 진취적인 기상, 벽화에서 엿보이는 문명 창조의 자신감, 여러 유목 민족을 아우르고 다스리면서 민족 갈등을 최소한으로 녹여낸 포용력과 경영 능력. 그 ‘온고이지신’의 학문이 곧 역사라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