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GO'라고 외치는 재일 한국인 문학
  • 윤상인 (한양대 교수·일문학) ()
  • 승인 2001.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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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리 등 이어 나오키상 받은 가네시로 '돌풍'

사진설명 변방에서 중심으로 : 일본 문학계에서 재일 한국인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양석일씨의 소설을 영화화한 최양일 감독의 <개 달리다>의 한 장면.

재일 한국인 문학이주목되고 있다. 1997년 유미리(柳美里)가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데 이어 1998년에는 양석일이 야마모토 슈고로(山本周五郞) 상을 받았고, 2000년 상반기에는오사카 한국인집단거주지역 이카이노출신인 현월(玄月·본명 현봉호)이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역시 한국 국적을 지닌가네시로 가즈키(金城一紀)가 대중성을지니면서도탄탄한 실력을 갖춘 작가에게 수여하는 나오키 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관심이 주요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했다는 이유에서만 비롯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듯하다.이들의 작품은 일본 독서 시장에서 꾸준히나름의 입지를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상반기와 하반기에 걸쳐 유미리의소설 <생명>과 가네시로의 는 소설 부문 베스트 10에 올랐다.특히 유미리는 작가로 데뷔한 지 겨우5년 만에 무라카미 류나 요시모토 바나나에 필적하는 인기 작가 반열에 올라섰다고 말할 수 있다.

광복 직후부터 1990년대초반에 이르기까지 김달수·김석범·이회성·김학영·이양지 씨가 면면히 맥을 이어왔지만, 얼마전까지 재일 한국인 문학은 어디까지나 일본 문학계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변방에 위치하고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것이다. 그러나4,5년 전부터 그러한 구도에 지각 변동이 일고 있다. 민족의식과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하는 기존재일 한국인 문학의 틀을거부하고 자신만의개성을 주장하는 젊은 신인 작가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재일 한국인 문학은 일본 문학의 제도권에 일정한 영역을 구축할 정도가 된 것이다.


'민족차별 고발' 넘어 보편성 천착

적어도 유미리 이후에등장한 재일한국인 작가들에게 '재일'이라는 관형어는 반드시 고발과 저항이라는메시지를수반하지는 않는다. '재일'이라는 불행하고도고단한 삶의 조건을 스스로의 문학적 성채로삼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처한 특수한 처지를 가족해체나 개인의 고독과 같은 보편적 주제로 녹여냄으로써 작품 세계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재일 한국인 문학의성격 변화와관련해서 가장 주목해야 할작가는 가네시로가즈키이다. 그의 나오키 상 수상작(현대문학북스 펴냄)는 재일 한국인 문학에대한 일반 관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 재일 한국인 문학에 대한일반 관념은 무엇이었던가? 그대답은 가네시로의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 중 한 구절에서빌려올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재일 문학은 모두무겁고 어두우며 재미가 없었다.우리들 세대를 향한 새 여흥을 쓰고 싶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불손하기조차 한 이 발언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해 준다. 즉 '무겁고 어두우며 재미가 없는' 기존 재일 문학을 거부하고 '가볍고 밝고 재미있는' 소설을추구한다는 것이거니와, 이것이야말로 지난 반 세기 동안 차별에 의한 고통과 저항이라는 주제를 버팀목으로 삼아 온 재일 한국인 문학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혁명적이리만큼 천진스런 문학적 출사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에서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 동포의 부조리한 삶의현실이 말끔히 소거된 것은 아니다.이 소설을이끌어 가는 이야기의 중심은 재일 동포 3세 고교생과 일본인 소녀와의 사랑이지만,일본인 사이에서 대물림해 온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타자 인식에 대한 고발도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가되고 있다. 그렇다면가네시로의소설은 지금까지의 재일 한국인 소설과 무엇이 다른가?

적지 않은 재일 동포의 경우,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멸시와 비하의 시선에노출되어 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부당한 차별에 반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인들로부터 투사된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자기도 모르는사이에 내면화하여 자기 비하에 익숙해질 수 있다.

양석일이나 현월의 소설에서 지나치리만큼 부각되는 재일 한국인 사회의 야만성과 폭력성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재일 동포 사회에 가해진 차별 구조가 내면화한 것과 결코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그들'이 '우리'로부터 보고자 하는 것을 '충실히' 보여주는 내부 식민지적 구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유미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과도하게 비정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인물들 역시 차별을 겪은 작가의정신적 상흔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는화농 현상의산물일 수 있다.

그러나 가네시로의 소설에등장하는 주인공 고교생은, 한국인의 피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비하를 강요하는 외부 환경에비록 실망하고 좌절하지만굴복하기를거부한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국적이나 피를 떠나한 개인으로서 자기 존재에 대한 확고한애정과 자신감이다. 25승 무패. 주인공'나'에게 도전한 일본인 학생들과 주먹으로싸운 전적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이것 역시 다른 재일 한국인 문학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조센징'을 표상한 것이 아니고 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무국적파 세대의 혁신적 문학 실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에서부터 미국 영화에 이르기까지 대중 문화에 정통하고, 난삽한 생물학적 원리까지 설파하는가 하면, 한번마음잡고 공부하게되면 대입 모의고사에서 '대단한'성적을 올리는데다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속의 정신적귀족주의 취향을 가진 주인공 못지 않게 품격 있는 조크까지 던질 수 있는 문무 겸비한 슈퍼맨이다.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그의절친한 친구 정일은 지적인 문학청년으로 나오고, 주인공의 아버지는 비록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권투선수 출신이지만(여기까지는기존 재일 한국인 문학에서 낯익은 판에 박힌 유형이다),공산주의운동에 심취하여 마르크스와 니체까지 읽고, 주먹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도 닦은 선승처럼 혜안이 번득이는 인생 담론을 늘어놓는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심지어 재일 한국인 소설에까지 침윤된 일본과 한국 사이의우열 관계 도식은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완전히 무화된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위의 인물들은 국적이나 혈통만을 이유로 한 개인을 근거 없이 차별하는 일본 사회의 후진성을 고발하는 역할을수행하고 있는셈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단호하고 당당하지만, 거기에 '재일'이라는 체험에 기댄 한풀이 식 원념은 섞여 있지 않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은그 제목만큼이나 새롭고 파격적이다. 그의경쾌한 문체와 대중문화적 감각은 그가 오에 겐자부로나 이회성의 적자이기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학생이었음을 들춰내 보인다. 국적을 '임대 계약서' 정도로 치부하는 작가의 '재일'이라는 현실에대한 시각도 혁신적이다. 그는 앞의 수상 소감에서 "앞으로 기존 재일 한국인 문학의 틀을 부수고 마지막으로는 재일이라는 문자를 지워 일본 문학 안에서 창작 활동의 길을걷겠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그의 말대로라면 재일한국인 문학은머지 않은 장래에 소멸할 운명인가?가네시로는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코리언 재패니즈(한국계 일본인)라고 칭한다.어느 쪽에도 온전히 '귀속되지 못한'것을원죄처럼 여겼던 세대가 있었다.그러나 오늘날 부초처럼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것을무상의 특권으로 여기는 무국적파 세대가 등장했다. 재일 한국인 문학은 머지 않은 장래에소멸할지도 모르나, 그 대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는무관한 형태의 '재일 문학'을 위한 과감한 실험이 막 시작된 것만큼은분명하다. 이쯤해서 관중석에서 격려한마디쯤있을 법하지않은가? "GO! 재일 한국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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