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붐 꿈이었나 환상이었나
  • 노순동 기자 (soon@e-sisa.co.kr)
  • 승인 2001.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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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속 출판, 질 저하'로 위기 맞아…10대 독자도 점차 외면

"저 ○○출판사에서 나온 판타지를 모두 읽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여? 저는 1백60권 정도 읽은 사람이예여. 수능시험도 있고 해서 계산을 해보아야 해서리." "re:1권에 1시간 30분쯤 걸리니까…."

인터넷에서는 기성 세대가 본다면 기겁할 이런 대화가 심심치 않게 오간다. 대형 서점 교보문고에 따로 마련된 판타지 매장에는 책을 탐독하는 젊은 독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하지만 국내 판타지 문학은 위기의 징후가 뚜렷하다. 현재 판타지 전문 출판사로 문패를 달고 있는 곳은 황금가지·자음과모음·명상·청어람 등 네 곳. 여기에 군소 출판사가 가세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권당 매출이 격감하고 있다.

일찍이 판타지는 다른 장르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황미나씨 같은 중견 만화가는 누구보다 발 빠르게 코믹 판타지·SF 판타지 등을 실험했고, <신명기>의 유시진씨는 동서양의 신화적인 상상력을 아우르는 장대한 스케일로 판타지의 새로운 정전을 만들고 있다. 영웅담이라는 코드를 공유하는 무협과 판타지가 만나 환협(幻俠)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기폭제 구실을 했던 판타지 소설은 위기를 맞고 있다. 주범으로 출판사의 과욕을 탓하는 목소리가 높다. 판타지 붐에 편승한 출판사가, 조회 수가 높다 싶은 작품을 입도선매하다 보니 배를 가르고 알을 꺼낸 꼴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출판사 과욕으로 판타지 문단 슬램화


황금가지 편집자 김준혁씨는 "서점이 아닌 대본소를 겨냥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졸속 출판과 질 저하'라는 무협지의 전철을 되풀이하는 경향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현재 대본소용으로 팔려 나가는 기본 물량은 3천∼5천 부. 이들을 겨냥해 책을 찍어도 판타지 소설 초판의 손익 분기점인 3천부 정도에는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환 고리에 걸려든 작가도 피해자다. 통신에 연재할 때 출판 제의를 받았다는 한 작가는, "처음에는 내 작품이 동양적 판타지를 시험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자부심이 드높았지만, 시장 독자의 반응을 보고 상처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안팎에서 옥석을 가리라는 요구가 들끓으면서 대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부산하다. 문학상은 훌륭한 거름 장치다. 현재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시상 제도로는 민음사의 자매회사이자 판타지 전문 출판사인 황금가지가 주관하는 황금 드래곤 상을 꼽을 수 있다. 장르 웹진을 표방하고 지난해 12월 문을 연 <이매진>(www. emazine.com)은, 비평에도 적극적이다. 20자 평·별점 등을 통해 네티즌의 자발적인 비평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지난 2월7일 첫 수상작을 낸 황금드래곤 문학상은 판타지 문학의 현황을 잘 보여준다. 응모한 작가는 총 1천85명. 다른 문학상과 달리 6개월에 걸친 사이트 공모와 심사를 병행해 당선작을 냈다(이지현씨의 <영혼의 물고기>·3월 출간 예정). 하지만 이 작품은 시비에 시달렸다. 조회 수가 최고가 아니었고, 통신 문단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심사단이 기성 문단 출신이어서 판타지의 코드를 모르는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심사위원장이었던 김성곤 교수(서울대·영문학)는 "요즘 대세와는 다르지만 기본기가 순문학 작가 못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역량이 뛰어나다"라고 평가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무를 주관한 김준혁씨는 "묘사나 서술 없이 만화나 게임 시나리오를 방불케 하는 글이 많다. 칼을 '쉭' 뽑아들어 '휙' 내리치니 '슁'하고 피가 솟구치고 '퍽' 쓰러졌다와 같은 문장은 애초에 작가가 문체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상측은 대안을 찾았다. 글맛은 떨어져도 발상이 기발한 작품을 위해 시나리오 파트를 신설하기로 한 것이다. 비평 부문도 신설했다.

다른 출판사의 공모전에서 심사를 맡았던 한 평론가는, 응모작의 수준에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장 상상력이 자유로워야 할 장르에서, 오히려 기존 관습을 답습하더라는 것이다. 그의 진단은 비관적이다. "판타지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상상력을 뜻한다. 이성의 횡포에 반발해서 시작된 낭만주의 계보를 잇는 구미의 판타지 문학과 현재 한국의 그것을 함께 비교하기는 어렵다"라고 말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10대 독자들마저 베끼기와 짜깁기로 일관하는 작품에는 흥미를 잃는 기색이 뚜렷하다. 그들은 비평 언어를 갖지 못했을 뿐 감식안이 없는 것이 아니다. 게시판에는 '그 책은 사지 말라. 빌려 보면 충분하다' 또는 반대로 '이 작품 짱이다'라는 단평이 심심치 않다.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에 대한 애착도 유별나다. 그 틈을 노려 성공한 것이 바로 이영도씨의 신작 <폴라리스 랩소디> 양장본이다. 여덟 권을 한 데 묶고 소가죽으로 표지를 만들고 은테까지 둘렀다. 가격은 7만원. 5백 부를 찍어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있는데 현재 4백40부 가량 소화되었다.

문화 상품의 총아로 주목되었을 때나 거품이 스러지고 있는 지금이나 국내 평단의 시선이 싸늘하기는 마찬가지다. 순문학계는 보르헤스나 마르케스, 카프카의 작품을 들이밀면서 기를 죽이고, 장르 문학으로서 판타지의 가능성을 높이 사는 사람들도 이미 고전이 된 <반지전쟁> (J.R.R. 톨킨)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롤), <해리 포터>(조앤 K. 롤링)를 잣대로 성적을 매기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 관심 시들해지자 "한국형 찾자"


판타지 문학은, 외부의 관심이 시들해진 지금 오히려 문제 의식을 벼리고 있다. 한 예가 한국형 판타지 모색이다. 엘프나 드워프, 호비트나 오크가 등장하는 중세를 배경으로 한 마법 판타지가 아니라 동양을 무대로 한, 혹은 동양적인 호흡을 느낄 수 있는 틀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 하이텔에서는 이우혁·이영도·이경영 씨가 한국적 판타지를 논제로 토론을 벌였다. 2000년 4월에 깃발을 올린 '한국형 환상 연구 모임'(www.kfantasy.com)은, 대표 작가 다섯 사람이 꾸리는 소박한 사이트인데도 하루 5백 명 이상이 다녀갈 정도로 관심이 높다.

판타지 장르에 애착이 강한 소설가 송경아씨는, 순문학과 장르 문학 사이의 간극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서사가 활력 있고 청소년 독자를 유인하는 힘이 큰 판타지와 품위 있는 문체나 인간에 대한 탐구가 돋보이는 순문학이 서로 배울 점이 많은데도 평행성을 긋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판타지 문학의 가장 큰 미덕으로 '지금, 이곳'이라는 한계를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지금, 여기'의 갈등을 잘 투영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평범한 인간이 오히려 '머글'이라는 종족으로 분류되는 마법의 세계(<해리 포터>), 인간보다 열등해 보이는 종족인 '호비트'가 세계 구원의 열쇠가 되는 설정(<반지 전쟁>)을 통해 인류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서 교육에도 판타지는 기여할 바가 많다. '나쁜 책을 읽어서가 아니라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송경아씨는 "어떤 책이든 많이 읽으면 임계점에 다다른다. 좋은 작품에 목말라하고, 바탕이 된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라고 말한다. 판타지 소설을 읽느라 밤을 새는 자녀를 위해 근심하지 말라는 충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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