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읽었노라, 웃었노라, 아팠노라/소설〈마이너 리그〉
  • 노순동 기자 (soon@e-sisa.co.kr)
  • 승인 2001.05.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은희경 소설〈마이너 리그〉/
패자부활전 없는 사회에 대한 재담 섞인 보고서


이제 막 독자 사인회를 마치고 왔다는 작가 은희경씨(42)는 피곤해 보였다. 서점 한복판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일에 좀체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요새 그녀는 문학이 외면받는 시대에 잘 팔리는 작가로서의 영욕(榮辱)을 두루 맛보고 있다.




얼마 전 출간된 소설 〈마이너 리그〉 (창작과비평사)는 유난히 말이 많다. '58년 개띠 모욕설'과 '회고 취미 편승설' 그리고 '잘 나가는 사람이 마이너의 세계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는 시비다. 여기에 여성 작가가 남자들 세계를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는 딴죽도 있다.


마이너의 던적스러운 삶 생생히 보여줘


독자들의 호응이 뜨거운데도 은씨는 그런 시비가 못내 섭섭한 모양이었다. 사실 데뷔 이후 줄곧 오해를 많이 받아 왔다. 특히 1958년 개띠를 희화화했다는 대목에 대해서 의아해 했다. "나도, 너도 마이너라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현실에 주먹을 불끈 쥐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좀 가볍게 돌아봐도 되지 않을까. 세상을 산다는 것이, 사회 속의 개인이라는 것이 요런 모양이라고."


〈마이너 리그〉는 고교 시절 숙제를 해가지 않아 함께 기합을 받으면서부터 한데 운명이 얽혀버린 4인방, 즉 화자인 형준과 조국·두환·승주, 그들 모두의 우상이었으나 가장 의외의 인물인 두환과 함께 야반도주한 소희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 속에 무수히 박힌 삽화들은 1958년 개띠, 그리고 그 언저리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뛰어난 환기력을 발휘한다. 주인공은 읊조린다. '우리는 전쟁이 끝난 뒤 베이비붐을 타고 우글우글 태어났고 3부제 콩나물 교실에서 어깨를 부딪혀 가며 공부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입시 제도가 바뀌었다.' 대마초 검거 선풍을 둘러싸고, 그 세대가 술집에서 뇌까렸을 법한 얘기들도 친숙하다.


'4+1'이라는 구도 때문에 영화 〈친구〉와 한 데 묶이기도 하지만, 4인방이 사회로 나간 뒤부터는 이야기의 갈래가 확연히 달라진다. '우정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는 〈친구〉와 달리 〈마이너 리그〉는 세태 소설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마이너들은 어떻게 뒹구는가. 먹고 살기 위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등쳐 먹는가. 그리고 거기에 어떤 명분이 동원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언론사와 이벤트 회사를 배경으로 한 촌극은, 이른바 고급 협잡에 어떻게 '구라'가 동원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이야기가 워낙 생생한 탓에 문화 평론가 이성욱은 그녀를 날씬한 여검객에 비유했다. 농담과 유연한 푸트 워크로 시종 급소를 집어내되, 그 급소 위에 핏방울이 돋아날 정도로만 찌르고 물러선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이 소설은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에 대한 재담 섞인 보고서다. 한번 비주류로 낙인 찍힌 이들에게 한국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메이저 독식' 구조인가를 요령 있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은씨가 아무리 날렵하게 검을 휘두른다고 해도 그녀가 마이너에게 보내는 시선은 결국 연민이다. 이죽대는 듯한 말투에 몸을 싣고 키득대면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짜안한' 느낌이 밀려들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다. 은씨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상황은 한때 남성성에 대한 신랄함을 갖게 했다. 남성과 화해하게 만든 것은 삶의 마이너리티 안에서의 동료애다"라고 말했다. 먹고 사느라 닳아빠진 동료들에 대한 연대감인 셈이다.감독/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주연/니콜 키드먼
제작/톰 크루즈·박선민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1945년, 영국 남부 해안의 외딴 저택. 그곳에는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독실한 기독교도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빛 알레르기 때문에 빛에 노출되면 목숨까지 위험해지는 희귀병을 가진 두 아이와 살고 있다.


어느 날 집안일을 돌보던 하인들이 갑자기 집을 떠나고, 전에 이 저택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하인 세 사람이 찾아온다. 그레이스는 두 아이를 빛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이 저택에서 꼭 지켜야 할 ‘절대 규칙’을 새로 온 하인들에게 알려준다.

그 규칙은 ‘커튼은 항상 쳐져 있어야 할 것, 문을 여닫을 때는 반드시 먼저 열었던 문을 닫고 나서 다음 문을 열 것, 등불 이외에는 어떠한 조명도 사용하지 말 것’이다.


그러나 저택에서는 기괴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피아노가 갑자기 연주된다. 또한 딸 앤은 ‘이상한 남자아이와 할머니를 집안에서 보았다’는 얘기를 반복한다.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한 그레이스는 딸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잇달아 벌어지는 기괴한 현상들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려움은 그 무게를 더해 간다.


마침내 그레이스는 그들을 위협하는 공포의 실체와 마주치는데…(1월11일 개봉 예정).



보이지 않는 공포
섬뜩한 반전
★★★★☆



<디 아더스>의 내용을 거론하는 것은 실례다. 2차 세계대전 말을 배경으로 빅토리아풍 대저택에서 펼쳐지는 이 시대극 분위기의 공포 영화는 모성과 광기와 종교적 억압을 한번에 꿰는 유령 이야기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언덕 위의 푸른 집’ 계열의 오래된 전통 공포 영화의 현대판인 <디 아더스>는 서서히 집안을 짓누르고 있는 공포의 실체를 벗겨 보인다. 이 집안에 뭔가가 있는 것이다. 뭔가가.



이 영화의 공포는 비가시성, 즉 상대는 나를 빤히 보고 있는데 나는 그를 볼 수 없다는 데서 나온다. 실례를 무릅쓰고 딱 한마디만 하겠다. 그 상대는 보이지 않는 유령이다. 그런데 유령은 과연 누구일까.


집안에 빛이 들지 못하게 하는 여주인공 그레이스의 편집증을 핑계로 감독은 빛과 어둠의 교차를 이용해 이야기의 재미를 꾸민다. 모든 통신 수단으로부터 차단된 어둠의 집은 무의식적인 욕망을 억눌러야만 하는 그레이스의 심리적 정황과 흡사하다. 이곳에서 그녀가 대면하는 공포스런 풍경은 그녀의 억눌린 욕망이 투사된 판타지인지 현실인지 아리송해진다.


트위드 옷을 입고 창백한 얼굴을 한 니콜 키드먼은 폐쇄적인 자기 세계 안에서 무너지는 뒤틀린 욕망의 여인 그레이스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그녀는 이 영화가 전하는 공포의 매개자다. 고전 영화 시대의 차가운 관능미를 지닌 여배우의 모습을 계승한 키드먼의 서늘한 자태는 그레이스의 의식을 통해 사태를 파악해야 하는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다.

그녀의 곁에 있는 하인 밀스 부인(피오눌라 플래나건)은 이 유령 씌운 집의 비밀스런 내력에 대해 뭔가 알지만 속으로 감추고 있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정신 없이 혼란에 빠져드는 그레이스를 구할 수호 천사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체 없는 유령과 한통속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아슬아슬하게 겹쳐진 밀스 부인의 이중성은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포개진다.

그것은 바로 공포스러운 유령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경험이다. 우리 안의 낯선 것을 한번 지켜 보라고 내기를 거는 이 영화적 게임은 미소를 띠고 주문을 거는 귀신과 대면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후반부에 연이은 두 차례 반전은 자기 안에서 일그러진 또 다른 자아를 보는 섬뜩한 경험을 안겨준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공포다. 유령이 나올 것같이 음습하면서도 화려한 집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던 끝에 그것이 인간 내면에 자리한 어두운 그늘의 비유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디 아더스>는 스페인 출신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이 진귀한 재능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담긴 섬뜩한 공포가 천재성의 산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개운하지 않은
결말과 교훈
★★★☆☆




<떼시스>와 <오픈 유어 아이즈>를 통해서도 입증되었지만, 스페인의 신동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