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위기의 기독교 향한 '광야의 외침'
  • 배철현(한님성서연구소 연구위원) ()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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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찬선의〈기독교 죄악사〉·한용상의〈교회가 죽어야…〉·
오강남의〈예수는 없다〉


'아직도 교회에 다니십니까?'오강남 교수의 최근 책 〈예수는 없다〉의 부록 II에 실린 서강대 길희성 교수의 설교 제목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요즘 같은 교회는 다니기가 어렵다는 뜻에서 붙인 말인 것 같다. 사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많은 경우에 부끄럽기 때문이다. 몇몇 대형 교회는 권력화·기업화해 정치꾼과 장사치들이 무색할 정도이고, 목사 세습화와 교인 우민화로 그리스도인들을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계급으로 타락시키는 데다, 일부 지역에서는 신종 '가짜 양반' 계급을 만들고 있는 듯하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위기에 봉착했다. 한국 사회에서 위기에 봉착하지 않은 단체가 있겠는가마는, 그리스도교의 증세는 어떤 단체보다도 심각하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교회의 본질인 '예언자적 비전'을 잃은 지 오래다. 그들은 비전의 선명함도 없고, 인간과 신을 이해하는 데에 섬세함이 없으며, 양심 있는 도덕적 행동도 없다. 한국 그리스도교 선배들인 정약용 이 벽 유영모 함석헌 안병무 서남동의 예언자적 유산은 잠들었거나 거의 자취를 감추어 소수 그리스도인에 의해서만 이어지고 있다. 정치적·문화적 보수 경향이 이 비전을 침몰시키고 대부분의 교회를 길들여, 이제는 교회의 목을 졸라 숨을 못 쉬게 한다. 이들이 길들이는 것은 우상이다. 그리스도교는 한국의 천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물질주의와 내세 신앙의 '신들'을 신봉하고, 한국의 천민 문화가 세운 제단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종교 생활은 주일 예배와 매일 새벽 기도와 그밖의 수많은 모임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적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 영적인 깊이가 없는 데서 오는 이 공허함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개인 기복주의에서 기인한다. 교회·개인 중심의 종교 행위는 한국 사회에 판치고 있는 개인주의를 흉내 내어, 영적인 각성보다는 순간적인 표피주의에, 헌신적인 자기 부인보다는 감상적인 자기 매질에 빠져 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이런 형태의 종교는 한국의 소비주의·자기 도취증·성적인 타락과 잘 맞아떨어진다. 소비와 존재론적 공허를 부추기는 자극의 노예가 된 사회에 한국 그리스도교가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개신교·천주교 죄악 '낱낱이 고발'


이러한 교회가 약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된 팔레스티나의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세워졌다. 물론 예수는 종교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는 '현상 유지(status quo)'를 지향하는 어떤 형태도 부정한다. 그래서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시 유대교의 중심지이며 현상 유지의 상징이던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인간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신을 '신의 집'에 가두어 놓고 신에게 예배를 드린다는 미명 아래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회당으로 상징되는 '종교'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현상 유지이기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실행했던 예수와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요즘 한국 교회, 특히 개신교에 대한 순교자적 '다시 읽기'가 출판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첫 번째 책은, 감리교신학대·목원대·이화여대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다가 은퇴한 조찬선 원로 목사가 쓴 〈기독교 죄악사〉 상·하(평단문화사, 2000년)가 그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천주교와 개신교의 '죄'를 낱낱이 고발하는 한국판 마르틴 루터 백서이다.


두 번째 책은, 일반 신자로서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과 언론에 몸 담았던 한용상 선생의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해누리, 2001년)이다. 이 책은 한국 근대사의 정치 부패와 그 하녀 노릇을 했던 한국 교회의 타락상을 고발했다.


세 번째 책은, 캐나다 레지나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년)이다. 오교수는 한국 교회가 예수를 한국의 실존적인 상황에서 토착화를 거치지 않고 서양으로부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예수는 없다'라고 주장한다. 성서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들을 재해석하고, 최근 북아메리카에서 개진된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소개한다. 그는 비교종교학자로서 예수 이해는 이웃 종교, 아니 한민족의 전통적인 사상과 종교와의 유기적 관계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종교 다원주의' 처지에서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위의 책들은 성역화·권력화한 한국 그리스도교를 향해 외치는 세례 요한의 '광야의 외침'이다. 이 외침은 이제 한국 그리스도교 성직자·평신도·비그리스도교인 들이 들어야 할 이 시대의 화두이기도 하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벼랑 끝에 서 있는 한국 사회의 추락을 부추길 것인가, 아니면 이 화두에 대한 자기 성찰을 통해 예수가 2000년 전 팔레스티나에서 행했던 자기 희생적 정의 구현과 사랑 실천의 추종자가 되어 한국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지향해야 하는 종교 개혁의 시작인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담을 넘어야 하고, 개신교 안에서 종파 간 분쟁을 치료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전통 종교인 샤머니즘·유교·불교 등과 적극 대화해 우리의 신이 그리스도교만의 점유물이 아님을 밝혀내야 한다.


한국인들에 의한 '성서 토착화' 이루어져야




'예수 읽기' 또는 '기독교 읽기' 책들




































책 이름 지은이(옮긴이) 펴낸 곳
예수는 없다 오강남 현암사
기독교 죄악사 조찬선 평단문화사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한용상 해누리
예수는 누구인가 존 도미니크 크로산
(한인철 번역)
한국그리스도교연구소
예수에게 솔직히 로버트 펑크(김준우 번역) 한국그리스도교연구소
역사적 예수 존 도미니크 크로산
(김준우 번역)
한국그리스도교연구소


한국 그리스도교의 르네상스('다시 태어남')에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과제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무엇인가?'아니 '성서는 한국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진지하게 논의해 본 적이 없다. 구약 성서의 히브리어 원전이나 신약 성서의 그리스어 원전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성서가 돌에 새겨진 닫힌 책이 아니라, 이독(異讀)과 필사자의 실수가 있는 열린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성서들'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성서'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그러하다.


성서가 정경화하는 과정은 현재 북아메리카주의 '예수 세미나' 회원들이 '예수의 어록'을 투표로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세속적이고 정치적이다. 그리고 장로교 창시자 칼뱅이나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의 교리가 성서를 대신할 수 없다. 그들은 구체적인 역사와 삶의 정황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오늘날의 한국인에게는 그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교리는 분명 성서보다 앞서지는 않는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이들이 해석한 것을 성서 번역에서 기껏해야 미주나 각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서가 씌어진 삶의 정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고대 근동과 그리스-로마 제국)를 기초로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다. 지난 2000년 간 이루어진 서양 학자들의 해석이나 번역에 의존하지 않고 성서를 21세기 한국인들에게 직접 접목함으로써 한국인들에 의한 토착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발간된 한국 그리스도교의 백서들이 21세기 한국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 되어 자본주의와 맘몬주의의 논리를 해체하고 2000년 전 청년 예수가 보여준 예언자적 비전과 행동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직도 교회에 다니십니까?'라는 질문은 다시 '아직도 교회에 안 나가십니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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