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에서 팝페라 가수로 변신한 마리아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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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라 브라이트만 되겠다"

뛰어난 가창력에 섹시 외모 겸비


'2년 사이에 68kg에서 43kg으로 변신'. 다이어트 광고가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팝페라 가수 마리아(본명 심현영·24)가 성악가에서 대중 가수로 거듭나기 위해 줄인 몸무게를 말한다. 때로는 굶고 때로는 약을 먹으며 '살과의 전쟁'을 벌인 끝에 그녀는 '육중한' 몸매를 '육감적인' 몸매로 다듬었다.




크로스 오버(장르 혼합) 음악의 대표적인 형태인 팝페라는 팝과 오페라를 합친 것으로 최근 가장 각광받는 음악 스타일이다. 오페라의 뛰어난 가창력과 팝의 대중성을 결합한 팝페라는 특히 유럽에서 인기가 있다. 영국의 사라 브라이트만과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로 사피나는 대표적인 팝페라 가수이다. 최근 출시된 마리아의 데뷔 앨범 〈뮤즈〉에는 나폴리 민요를 경쾌한 댄스 곡으로 바꾼 〈오 솔레미오〉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편곡한 〈문라이트〉가 실려 있다.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다녔던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국립 음악원 출신인 마리아는 본래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도 여러 번 주연을 맡았던 재원이다. 더 대중적인 음악을 하기 위해 2년 전 그녀는 성악가의 길을 버리고 팝페라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수로 꼽혀


하지만 촉망받던 성악가가 대중 가수로 거듭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늘 칭찬만 받다가 '그렇게 부르면 안돼'라는 핀잔을 듣는 것은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진짜 어려운 것은 몸무게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의 무게를 줄이는 일이었다. 대중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목소리의 힘을 빼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목소리를 바꾸는 것은 그러나 시작이었을 뿐이다. 무대에서는 역동적이고 섹시해야 한다는 대중 음악의 문법도 받아들여야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무대에서 야한 의상을 입고 나와 섹시한 춤을 추었다. 어색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꽤 그럴듯해 보였던 것 같다. 사실 외모 콤플렉스도 있는데, 섹시 가수로 대접받는 것이 조금 낯설다." 그녀는 요즘 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수로 꼽힌다.


그녀는 이제 성악가로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대학교 때 지도 교수가 〈열린 음악회〉에서 〈새타령〉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가 경박하다고 '왕따' 당하는 것을 보았다. 다시 성악하겠다고 하면 나도 박쥐 취급을 당할 것이다. 팝페라가 대중 음악 쪽에서 보면 우아해 보이지만 클래식 쪽에서 보자면 '엽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실 검정과 흰색으로만 되어 있는 클래식의 세상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난 원래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개똥을 보면 대장과 괄약근의 움직임이 생각나고, 토사물이 널린 것을 보면 목구멍을 통해 역류하는 음식물의 매운 기운이 느껴졌다."


혹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분명하다. "고급 음악·저급 음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페라도 원래는 서민과 귀족이 함께 즐기던 음악이었다. 형식적인 커튼 콜이 아니라 뜨거운 환호를 보내는 팬들 덕분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팝페라 가수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이번 앨범에는 7 대 3정도로 댄스 곡이 크로스오버 곡보다 많다. "청중이 변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먼저 변했다. 눈높이를 맞췄다가 점점 크로스 오버 곡을 늘릴 생각이다. 이번 앨범의 댄스 곡들은 호객하기 위한 일종의 '미끼'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가수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사라 브라이트만과 같은 가수가 되겠다고 답했다. "보이는 것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화가가 좋은 화가이듯 들리는 것에 들리지 않는 어떤 것을 느끼도록 만드는 가수가 좋은 가수라고 생각한다."와유산수(臥遊山水)라는 옛말이 있다. 여행일랑 봄 가을에나 하고 더울 때는 그저 방 안에 드러누워 유산기(遊山記) 따위를 읽으며 책 속의 만고강산을 즐기던 선비들의 풍류을 이르는 말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1935년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고 쓴 <천상의 두 나라>(정영문 옮김·예담 펴냄)는 이 여름 와유산수 하는 데 그만이다.





물론 이 책과 전통적인 유산기는 다르다. 한쪽이 자연을 정신으로 번역해 관념 속의 신선놀음 취향이 짙은 데 반해, 다른 한쪽은 ‘나는 육체가 없는 추상적인 기억에 의해 마음이 살찐 적이 없다’고 단언할 만큼 철저하게 구상의 세계에 탐닉하고 있다.



<천상의 두 나라>에서 작가는, 훗날 그가 창조한 ‘희랍인 조르바’라도 된 양 여행의 관능과 열락에 온몸을 내맡긴다.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서양인의 편견(혹은 오해)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향기와 악취, 매혹과 혐오를 함께 껴안는다. 가령, 이제는 버려져 폐허가 되어버린 베이징의 쯔진청(紫禁城)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사라진 황제의 절대 권력을 떠올리는가 하면, ‘순진한 어부들이 배고픈 잡역부로 전락한’ 상하이에서는 뒷골목의 끔찍한 냄새와 소음에 진저리친다. 도쿄에서는 진열장 안에 창녀들이 앉아 있는 홍등가에 찾아가 불쾌한 밤을 보내는가 하면, 근사한 요릿집에서 게이샤들의 춤과 노래, 샤미센 연주를 즐기며 아낌없는 찬사를 바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천상의’ 두 나라인가. 작가에게, 중국은 ‘거대한 영혼’의 나라요, 일본은 ‘신비로운 관능’의 나라여서다. ‘중국인만큼 자신의 영혼을 그토록 완벽하게 진흙탕에서 건져낸 민족은 없다’라거나 ‘일본만큼 가장 빛나는 순간의 고대 그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나라는 없다’며 작가는 감탄한다. 그 감탄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물론 독자의 몫이다. <천상의 두 나라>에는, 괴테의 이탈리아나 헤세의 인도가 그랬던 것처럼 카잔차키스가 창조한 중국과 일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경우는 우리 정서상 아무래도 선뜻 동의하기 꺼려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물됨이나 후지산의 순수성을 극찬하는 대목에 이르면 좀 거북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앞서, ‘벚꽃 뒤에 숨은 대포’를 간파하고 일본의 아름다움과 힘에 주목한 작가의 통찰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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