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극장에 몰아치는 '티보 혁명'
  • 샌프란시스코·민경진(자유기고가) ()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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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
광고 지우는 녹화 기기 '선풍'…방송사는 버추얼 PPL로 '응전'


2002년 월드컵 결승전. 공교롭게도 축구 앙숙 한국과 일본이 결승전에서 맞붙는다. 전·후반 치열한 공방 끝에 연장전까지 치르고도 승부를 가르지 못해 결국은 승부차기 한판. 한 골 한 골 숨막히는 순간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데, 회사원 김도일씨가 2시간을 넘게 참았던 소변을 더 견디지 못하고 결국 화장실로 향한다. 리모컨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자리를 뜬 김씨는 볼일을 마친 뒤 다시 재생 버튼을 눌러 생중계를 계속 본다. 결과는 한 골 차로 한국의 우승.




1년 뒤면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해질 전망이다. 티보(TIVO)라는 혁신적인 발명품이 등장한 덕분이다. 텔레비전이라면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사족을 못 쓰는 미국 사람들이 요즘 사고 싶어하는 전자제품 1순위가 바로 이것이다.


시청자는 신바람, 방송사는 '비상'


티보는 대용량 하드 디스크에 방송 전파를 60시간 분량까지 디지털 고화질로 저장하는 기계이다. 이 신통한 기계를 이용하면, 마치 비디오 테이프를 보는 것처럼 생방송을 자유롭게 정지시키거나 재생할 수 있다. 시청자가 미리 설정해 놓은 개인별 맞춤 시간표에 따라 원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에 마음대로 볼 수도 있다. 티보만 있으면 인기 드라마 〈태조 왕건〉을 보기 위해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종종걸음을 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모뎀을 설치하고 티보 공급사측에 매달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시청자들로서는 20년 전 비디오카세트레코더(VCR)가 등장한 이후 가장 혁명적인 신기술을 접하게 된 셈이다. 이것이 거꾸로 미국의 민영 방송사에게는 악몽의 시작이 되었다. 바로 티보에 광고를 자동으로 건너 뛰어 녹화해 주는 기능이 있었던 것. 덕분에 시청자들은 녹화를 시작하기 전 드라마 앞에 따라붙는 광고를 쉽게 잘라내고 광고 없는 온전한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드라마 중간 광고 역시 버튼 한번 누르면 간단히 건너뛸 수 있다.


미국 CBS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60분〉은 티보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빠르게 보급되자 광고 수익으로 연명하는 각 방송사 경영진마다 비상이 걸렸다고 전했다. 이들은 5년 내에 미국 가정의 50% 이상이 티보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럴 경우 광고 수익에 제작비를 의존하는 대신, 현재의 유료 채널처럼 시청하는 프로그램마다 요금을 내는 페이퍼뷰(Pay Per View) 방식을 전면 도입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CBS측 분석이다.


반면 시청자들은 신이 났다. 매일같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광고 홍수에 치를 떨어 온 미국 시청자들은 티보가 등장하자 쾌재를 부르고 있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방송사와 광고주가 아니다. 이들 또한 최근 들어 티보의 '광고 왕따'에 대항할 유력한 수단을 들고 나왔으니, 그것이 바로 버추얼 PPL(Product Placement) 광고 기법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광고주들은 티보의 '광고 왕따'에 대항해 버추얼 광고 기법을 발전시키고 있다. 경기장 광고 펜스에 선명하게 찍힌 코카콜라(위 가운데)는 버추얼 기술로 '심은' 것이다.


버추얼 PPL 광고란 이미 제작된 영화나 드라마에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동원해 광고하려는 제품을 디지털로 심어 넣는 최첨단 광고 기법이다. 미국의 유선 오락 채널 TNT는 6월부터 방영하는 미니 시리즈 〈법과 질서〉에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버추얼 광고 기법을 도입해 시험 중이다. 복도에 놓인 음료수 자판기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광고할 회사의 로고를 그려 넣거나 출연 배우 주위에 후원사 제품을 배치하는 기법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PPL 광고는 이미 영화를 비롯한 수많은 매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데미 무어는 리복 운동화 상자를 관객 눈앞에 들이밀었다. 007 영화의 제임스 본드는 오메가 시계를 차고 BMW 스포츠카를 몰고 등장한다. 몇 년 전에는 한국 식품회사의 참치 캔이 영화 〈고질라〉에 우연히 등장해 뜻하지 않은 광고 횡재를 얻었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버추얼 PPL 광고는 여기에서 한 단계 진화했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에 특정 제품을 '촌스럽게' 들이미는 것 없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모든 과정을 대체한 것이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드라마 주인공이 마시고 있는 코카콜라 상표를 펩시콜라로 둔갑시켜 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소품으로 가져다 놓은 냉장고의 상표도 실물보다 훨씬 뚜렷하게 부각할 수 있다.


버추얼 PPL, CG로 드라마 등에 광고 '심어'


엄밀히 따지면 버추얼 기술을 이용한 광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 중계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경기장의 광고 펜스를 아예 버추얼 펜스로 바꾸려는 시도가 이미 있었다. 경기장에 설치된 버추얼 펜스에는 특정 회사의 로고 대신 푸른색만 칠해져 있다(크로마 펜스). 여기에 방송사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후원사의 로고를 번갈아 심어가며 전파를 송출하면,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시청자들은 푸른색 펜스 대신 코카콜라·나이키 따위 각종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는 경기장 화면을 보게 된다.


이같은 강점에도 불구하고 버추얼 광고는 방송사와 경기 주최측 간에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후원사 로고가 중계 카메라에 노출되지 않아 손해를 보게 될까 전전긍긍하던 방송사들이 마음껏 광고 판매를 할 수 있게 된 데 반해 경기 주최측은 자신들이 유치한 스폰서의 광고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법과 질서〉를 제작한 USA필름측은 자신들의 창작물에 광고를 마음대로 끼워 넣을 권리를 제3자에게 부여한 적이 없다며 분개하고 있다(TNT는 이 시리즈를 USA필름으로부터 사들였다). 뉴미디어 감시 단체인 '디지털 민주주의'는 방송사가 아무런 고지도 없이 버추얼 광고를 하는 것은 시청자를 우롱하는 행위라며 연방통신위원회가 조사에 나서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리모컨이 생겨난 뒤 재핑족(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대는 집단) 때문에 골치를 앓던 방송사와 광고주는 티보라는 또 하나의 강적을 만났다. 어떻게든 광고를 덜 보려는 시청자와 하나라도 더 보게 하려는 방송사 및 광고주. 이들의 대결이 어디까지 갈지, 예측불허인 '광고 대전'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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