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 "가자, 월드컵으로!"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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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컬렉션에서 디자이너 · 학자 이구동성…
"세계화 전환점으로 삼자"
"한국 디자이너가 일본 디자이너보다 못할 게 없는데 아직도 한국은 패션 후진국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월25일 2002 S/S(봄/여름) 서울컬렉션의 딸린 행사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한 뉴욕 주립대학교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패션스쿨)의 김영자 교수는 한국 패션계의 현실을 이렇게 안타까워했다.




들어가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F.I.T.의 경우 10년 전까지만 해도 입학생 중에 한국 학생은 일본 학생 수의 20%밖에 되지 않았다. 또 졸업할 때면 한국 학생들은 '손재주는 있지만 창의성은 부족하다'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입학생 중 한국 학생은 일본 학생의 배에 달한다. 졸업식장에서도 한국 학생들이 여러 상을 독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좋은 인력이 패션계에 배출되고 있지만 한국 패션계는 안팎으로 위기에 몰려 있다. 패션 선진국과의 격차는 점점 커지는 반면 뒤쫓아오는 국가와의 간격은 자꾸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고급 브랜드에 잠식된 국내 시장은 여전히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도 패션산업은 저부가가치 산업에 머물러 있다.


한국 패션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는 열악한 유통 시스템이다. 디자이너의 창작 능력보다 장사꾼적 기질이 더 요구되는 상황이어서 끝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외국 브랜드와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는다. 브랜드 파워를 키워 가기보다는 유행에 편승하기 급급한 국내 패션계는 '디자이너의 지옥'이다.


"한국은 디자이너의 지옥이었다"




삼성패션연구소 정명숙 연구원은 한국 패션계의 정보 부족도 고질적인 문제로 꼽는다. 정보가 없다 보니 세계 패션계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제품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매년 패션쇼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패션 이류 국가의 현실'일 뿐이었다.


이런 한국 패션계에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월드컵이다. 월드컵은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한국의 이미지를 알린 시초였다면 이번 월드컵은 한국 패션계의 저력을 드러낼 본격적인 기회이다. 김교수는 "이제 실력을 인정받는 디자이너도 많고 저변도 확대되어 토대가 탄탄하다. 내년 월드컵을 한국 패션 세계화의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내년 월드컵 기간에는 한·일 공동 2002 월드컵 갈라쇼가 개막전이 열리는 서울과 폐막전이 열리는 도쿄에서 한 달 간격으로 열릴 예정이다. 한국과 일본의 패션 역량을 겨룰 내년 쇼에 앞서 프리쇼 의미를 갖는 서울컬렉션이 지난 10월25∼28일 무역센터 컨벤션홀에서 열렸다. 이번 서울컬렉션에는 일본의 신진 디자이너 4명도 참여해 내년 한·일 공동 갈라쇼의 성패를 가늠하게 해 주었다.


이번 서울컬렉션이 의미가 있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패션계의 '고해성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보통 세계 주요 컬렉션은 뉴욕에서 시작해 도쿄에서 끝나는데, 이보다 한 달 이상 늦게 열리는 국내 컬렉션은 외국의 경향을 곧바로 반영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서울컬렉션은 주요 컬렉션과 시차가 거의 없이 열렸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우먼드림 백선아 과장은 "그동안 한국은 복제 천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서울컬렉션은 한국 패션계가 스스로의 개성을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서울컬렉션에는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중견·신인 디자이너 30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파리·뉴욕·밀라노 등에서 해외 시장 진출을 적극 꾀하고 있는 이영희·문영희·홍미화·지민리 씨, 국내 시장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지춘희·박춘무·홍은주 씨는 이번 쇼의 대표적인 디자이너였다.


이번 쇼에서는 또 트로아 조의 아들 한 송, 이영희씨의 딸 이정우, 이신우씨의 딸 박윤정 씨 등 2세 디자이너들이 참여해 큰 주목을 받았다. 김행자씨의 딸 박지원, 진태옥씨의 딸 노승은 씨와 함께 이들은 가장 촉망받는 2세로 꼽힌다. 어머니로부터 한국적인 패션 양식을 물려받고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며 국제 감각을 익힌 이들의 작업은 한국 패션의 미래를 가늠할 잣대이다.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조화시키는 데 익숙해 '패션 제3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의 행보가 한국 패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88쪽 상자 기사 참조).


이번 쇼의 딸린 행사로 열린 세미나에서는 한국 패션의 미래를 여는 코드로 '개성'과 '팀워크'가 제시되었다. 명품과 유행을 좇는 1차원적인 소비 유형에서 자기에게 유행을 맞추어 가는 능동적인 소비로 바뀌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유행 시대'에서 '취향 시대'로 변화하는 것에 맞추어 디자이너들도 각자의 개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해외 시장 진출과 관련해서는 팀워크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동안 한국 디자이너들은 각자 해외 시장 진출을 꾀했지만 한국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세우며 공동 전선을 펴야 유리하다는 것이 이번 세미나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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