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두들겨 맞는 <나쁜남자>
  • 김은남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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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


아니나 다를까. 김기덕 감독의 일곱 번째 영화 <나쁜 남자>가 개봉관에 걸리자마자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논쟁의 핵심 진원지는 페미니즘 진영이다.


<여성신문>은 지난 1월12일 발행한 제660호에서 ‘영화 <나쁜 남자> 나쁘다’를 커버 스토리로 다루었다. 관련 논쟁에만 4면을 할애한 이 신문은 <나쁜 남자>가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을 담은 ‘마초 판타지’이며, 이런 영화가 공공 장소에서 버젓이 상영된다는 것 자체가 ‘여성에 대한 성적 테러’라고 주장했다. 영화 주간지의 양대 산맥이라 할 <시네21>과 <필름 2.0>도 논쟁 대열에 합류해 페미니스트 영화 평론가들의 비판론을 적극 수용했다.



이 영화에 대한 시비는 애초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사창가의 깡패가 자기에게 모욕을 준 여대생에게 복수하려고 그 여대생을 창녀로 만든다는 영화의 기본 설정부터가 그랬다. 심의에서 세 번 퇴짜를 맞았다는 도발적인 영화 포스터나 ‘내 애인 창녀 만들기’라는 광고 카피 따위도 여성주의자들의 비위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더욱이 김기덕 감독은 ‘상습범’ 혐의를 받아온 터였다. 여대생과 창녀가 서로 반목하다 일체가 되어 버리는 <파란 대문>(여대생이 아픈 창녀를 위해 손님 방에 대신 들어간다)이나, 낚싯바늘을 자궁에 집어넣으며 자기 육체를 끊임없이 학대하는 창녀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섬>에서부터 이미 평론가들은 김감독에 대한 우려를 제기해 왔다.



이를테면 남승희씨(문화 평론가)는 ‘①섹스는 강간이다. ②모든 여자는 창녀다. ③구원은 오로지 창녀의 품 속에서 가능하다’가 김기덕 세계의 공통 원리라고 못박았다. 이같은 ‘몸 팔아 성불(成佛)하세’ 식 이데올로기의 바탕에는 기실 지독한 여성 비하·학대 심리와 사디즘적 환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남씨의 주장이다.



‘이제는 쐐기를 박아야 한다.’ 이번 영화를 놓고 여성계가 들고 일어난 배경에는 이같은 절박감이 깔려 있다. 이는 김기덕 감독 개인을 넘어 한국 영화계에까지 확장되는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영화 평론가 권은선씨는 “가뜩이나 <친구>처럼 ‘마초 판타지’를 다룬 영화가 득세하는 데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있던 차에 <나쁜 남자>가 불을 지른 격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감독을 옹호하는 축은 “영화는 영화로 보라”는 입장이다. 영화 평론가 유운성씨는 “(김감독의 성적) 판타지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충족시키는 대신 우리로 하여금 욕망을 들여다보게끔 하고 그 심연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시네21>).


인터뷰를 거부한 김감독을 대신해 입장 표명에 나선 제작사(LJ 필름)는 △영화는 현실의 정확한 축소판일 따름이며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영화로 표현하거나, 그런 영화가 ‘의미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이른바 ‘페니스 파시즘’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영옥씨(이화여대 여성연구원 전임연구원)는 이것이 ‘재현의 정치학’을 무시한,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반박했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영화는 현실을 이미지로 재구성하며 이로써 사회에 다시 영향을 미치는 공적 매체라는 것이 그녀의 지적이다.


이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신봉한다는 구미에서도 인종적·계급적·성적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영화는 ‘감히’ 만들지 못하는 법인데, 김감독은 오히려 예술 감독으로 떠받들리는 상태에서 가부장제 사회의 무의식적 구조를 너무도 뻔뻔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 평단도 수용하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이단아’라는 삐딱한 시선에서 ‘회화적 이미지의 마술사’라는 컬트적 추앙까지, 다양한 평가를 받아 왔던 김기덕 감독은 이번 사건으로 또 하나의 수식어를 달았다.


‘페미니스트로부터 공개적인 선전 포고를 받은 최초의 감독’이 그것이다. 이들 페미니스트는 ‘김감독은 1990년대 한국 영화계가 배출해낸, 아니 토해낸 유일하게 ‘새로운’ 감독’(유운성)이라는 찬사에 이렇게 맞서고 있다. “김감독이 과대 평가되어 온 데는 해외 평단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이번 작품만은 ‘쇼킹 아시아’식 소재에 굶주려 있는 그들조차도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일 것임을 확신한다.”(김영옥)



어찌 되었건 김감독은 오는 3월 베를린에 간다. 이 도시에서 열릴 영화제에 초청됨으로써 그는 3년 연속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국내에서의 입지도 과거와는 딴판이다. 명필름·LJ 필름과 손잡은 김감독은 더 이상 비주류·저예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며, ‘심지어’ 흥행 감독이기까지 하다(일명 ‘조재현 효과’가 먹힌 덕분인지, 이번 영화는 개봉 6일 만에 전국 관객 20만명을 끌어모았다). <나쁜 남자>를 둘러싼 전선은 계속 확대될 수밖에 없다.
김은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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