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그리고 비장한 겨울 바다
  • 글/사진 강운구 ()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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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출렁대지만 바다는, 미동도 하지 않는 무거운, 그러나
아주 민감하게 계절에 반응하는 가벼운 피부를 지니고 있는 산과 달라
계절이 바뀌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본디 제 표정 그대로 한결같다.
그렇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것은 달라 보인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른 표정을 짓기도 한다.


바다 위로 지나가는 것은 배뿐만이 아니다. 바람이 언제나
먼저 지나간 물결 위로 어둡거나 밝은 빛을 일렁이며 따라간다. 땅끝에서
바라다보이는 바다는, 땅끝 ! 이라는 절대 한계를 금 긋는 뜻이 마음에
작용하므로 다른 바다와는 달라 보인다. 도대체 옛날 사람들이 그곳이
땅끝인 줄을, 한반도의 최남단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 냈을까 ? 그곳이
땅끝인 줄 알며 그 근처를 걷거나 또는 차나 배를 타고 살펴보아도 그
비슷하게 바다와 맞닿은 돌출된 땅들이 많아서 땅끝인 줄을 구분할 수
없다. 그렇다. 땅끝은 수없이 많다. 지도를 보면 영국의 남쪽 끝에도
‘랜드즈 엔드’라는 지명이 있다. 몰라서 그렇지 그런 지명을 가진
곳은 아마 더 있을 것이다. 꼭 그런 지명을 갖지 않았더라도 여러 의미에서
땅끝은 수없이 많다. 우리 나라 동 서 남 북 땅끝, 우리 도 땅끝, 우리
마을 땅끝, 내 땅끝(아 그러나 나의 땅끝은 없다. 내 땅이 없으므로).
어디라도 다 이런 저런 땅끝이다. 그러나 그런 끝은 밑이 안 보이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다른 평범한 시작으로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 고산자가 외롭고 고단한 몸으로 땅끝에 이르러
그곳이 한반도의 남쪽 끝인 것으로 확인하고 출렁이는 남쪽 바다와 떠있는
섬들을 바라다보았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물론 그 이 이전에 이미 토말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산자 같은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용케 알아낸 곳일
터이지만, 확인은 틀림없이 했을 것이다.


그 한적하던 곳이 관광지가 되어 저자 거리처럼 붐빈다.
특별한 볼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끝’자가 들어가 있는 숙연한 이름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 때는 숙연해질 수도 없다.
그래도 겨울철에는 한적하므로 끝머리에 앉아서 조용하게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먹구름으로 덮여서, ‘끝’답게 비장하고 어둡던 바다에,
물결로만 보이는 세찬 바람이 그랬는지, 아니면 하늘에서 무엇인가를
꼭 찾기라도 할 일이 있었는지, 구름을 가르고 그 틈으로 빛을 쏟아
부었다. 그 황홀한 빛은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다급한 서치라이트처럼
이리저리 옮겨 비쳤다. 그러고 이내 바다는 다시 비장해졌다. 썰렁한
겨울 바다 위로 휘황한 빛이 그리는 찰나가 지나갔다. 수많은 끝, 그만큼의
다른 시작.


* 강운구의 풍경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문외한들 듣기 좋으라는 소리로, 예술이 별거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들 하지만,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솔 펴냄)에서 저자(간송미술관 연구위원)는 예술이 별것이라고 못박는다. ‘세상에 예술만큼 울타리가 높은 것은 없다’라고. 울타리를 넘어야 울타리 안의 예원(藝苑)에서 노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국 전통 미술의 예원에 둘러쳐진 울타리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에 관한 책으로 읽힌다. 저자에 따르면, 우선 그림은 그 크기에 따라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보아야 한다. 그림을 가로지르는 대각선 길이의 1.5배 정도가 알맞다. 둘째로 우리 그림은 세로쓰기 책을 볼 때처럼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 무심코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보았다가는 김홍도의 <무동>(그림 참조)에서처럼 그림의 중심 축인 춤추는 인물이 감상자의 시선에서 비켜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는,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라는 것인데, 이 책의 진면목은 바로 이 부분에서 빛난다. 앞의 <무동>을 다시 예로 들면, 이 작품의 인물 배치는 원형을 이루되 밖으로 퍼져나가는 원심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음악과 춤은 신명을 밖으로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김홍도의 또 다른 유명작 <씨름>도 화면 구성이 원형이지만, 씨름이란 열심히 가운데를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에 구심력이 화면의 긴장을 지탱해주고 있다. 저자가 읽어내는 것은 조형 의식뿐만 아니다. 무동과 악사 6명의 표정과 복식까지 세세하게 살핌으로써 흥겨운 풍악이 한창 막바지로 치닫는 모습을 화가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해냈는지를 보여준다.



조선 시대 인물화를 언급한 뒷부분도 눈길을 끈다. 저자는 특히 이 재의 초상화로 알려진 작품을 렘브란트에 한치도 밀리지 않는 걸작으로 꼽았는데, 그 근거를 하나하나 제시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이 실은 이 재가 아니라 그 손자인 이 채라는 사실까지 밝혀낸다. 이를 위해 저자는 해부학 전문가나 피부과 전문의의 조언을 얻기도 한다. 얼굴 골격이나 수염 한 올, 피부병 흔적까지도 극사실로 그려내는 화가의 엄정한 붓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극사실 속에 담은 것은 조선 선비의 형형한 기개라는 추상의 세계였다.



저자의 위와 같은 길 안내를 차근차근 따라 가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전통 예원의 울타리 안에 들어섰음을 느끼게 되는데, 그 즐거움 덕분에 본문에서 언급되는 도판을 찾아 책장을 뒤적이는 수고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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