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쌈마이 세상의 쌈마이다”
  • 고재열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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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 주연 배우 설경구씨/“내 연기의 목표는 연기하지 않는 연기”

"살얘기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개봉 다음날 서울극장
근처에서 만난 <공공의 적> 주연 설경구씨(34)의 말이다. <공공의
적> 촬영을 위해 10kg 정도 불렸던 몸무게를 <오아시스> 촬영을
위해 18kg이나 줄이면서 그의 ‘고무줄 몸무게’ 얘기가 계속 보도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 ‘두부살’은 온데간데 없고 깡마른 팔에 커다란
손이 마치 바닷가재의 앞다리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살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고무줄 몸무게의 비결을 단지
체질일 뿐이라고 얼버무렸다. “살 늘리고 살 빼는 것이 생각대로 잘
된다. 18kg 정도 줄었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몸무게를 재보지 않았는데
아마 더 줄었을 것이다.” 다이어트 비디오를 찍을 생각은 없느냐고
농을 걸어보았더니 대답이 싱거웠다. “거창하게 비디오까지 찍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딱 두 어절이면 충분하다. 뛰면 된다.”


시나리오 분석은 ‘대충’…현장의 ‘감’으로 열연


지난해 <파이란>의 3류 건달 이강재(최민식 역)가 한국 영화의
힘찬 새출발을 알렸다면 <공공의 적>의 주인공 3류 형사 강철중은
한국 영화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고단한 우리 삶의 진내가 녹아 있는
<공공의 적>에는 씁쓸한 웃음이 있다. <박하사탕>으로 연기
인생에 방점을 찍은 배우 설경구는 이 영화를 통해 이제 성격파 배우로
‘이미지 굳히기’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몸무게를 늘리고 줄이는 것은 다른 연기자들의 기를 죽이려는
‘수작’이 아니다. 배역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이는 그에게는
배역을 체화하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 의례다. 그가 맡았던 배역은
모두 몸무게와 일정한 함수 관계를 갖고 있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게으르고 나태한 인물이다. 그처럼 되기 위해 살을 찌웠다.
몸이 무거워지니까 정말 움직이기가 싫어졌다. 덕분에 연기하기 편해졌다.
<오아시스>의 홍종두는 모두가 싫어하는,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인물이다. 깡마른 그의 몸집은 감옥에서 출감해 하는 일 없이 돌아다니다
사고만 치는 그를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두 인물 가운데 실제의 그와 닮은 이는 강철중이다. 과학 수사는커녕
오로지 감으로 범인을 붙잡고 무조건 추궁부터 하는 강철중처럼 그도
정확한 시나리오 분석을 통해 준비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느낌으로 연기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얼 찍는지도 모르고 현장에 온다’는
핀잔을 감독에게 들을 정도로 모든 것을 비워 놓고 오는 배우이다. 그러나
그는 출연한 영화마다 강렬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들을 그려냈다. “촬영장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그곳은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이기 때문이다. 스태프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죽기 살기로 찍는다. 모두들 눈이 이글거린다.
그 현장의 분위기를 몸에 담아 연기할 때 정말로 살아 있는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런 연기 방식은 연기에 대한 독특한 소신 때문이다. “나의
연기 목표는 ‘연기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진 다양한 측면에서
배역과 일치하는 부분을 이끌어 내면 대부분은 소화할 수 있다. 나 자신을
보여주는 일은 준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솔직해져야 되는 일이다.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에서 나는 최대한 내 식으로 말하고 내 방식대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내가 출연했던 영화의 배역들은 전부 나
자신이다. 내 모습을 극대화하거나 극소화한 모습이다.”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하나하나 꼽으며 자신과 주인공의 접점을
말했다. “나는 <공공의 적>의 철중처럼 게으르고 욕 잘하고,
<박하사탕>의 영호처럼 자기 연민이 강하다. 그런가 하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봉수처럼 사람들에게 무심하고, <송어>의
민수처럼 겉으로 대범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소심하다.”


현장 중심의 연기를 하는 것은,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감독이 끌어내 주는 것을 맞추어
주기 위해 노력한다. 감독은 배역에 대해서 200%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의도에 맞추어 주어야 한다. 가끔 감독이 요구하는 것이
틀리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일단 따르고 본다. 감독과
배우가 서로 신뢰한다면 절대로 엉뚱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촬영 현장에 가서 사람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도 내 삶에 충실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1년에 한 작품씩밖에 하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다작을 해볼까
생각 중이다. 진짜 사람 좀 되려고 말이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리셀 웨폰>의 마틴 릭스(멜
깁슨)나 <다이하드>의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이 보여주는
미국적인 경찰의 모습과 다르다. 악동이지만 정의의 화신처럼 행동하는
그들과 달리 강철중은 도덕 관념이 없다. “나쁜 놈인데 더 나쁜 놈을
만나 본의 아니게 선행을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범인을 쫓는 이유는
악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에 칼집을 낸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좋은 일은 했지만 결코 개과천선하지 않았을
인물이다. 그는 쌈마이이기 때문이다.”


쌈마이(3류를 의미하는 일본어 ‘산마이’에서 유래된 속어)? 세상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는 ‘우리는 모두 쌈마이다’라는 술주정으로
유명하다. “멋있는 척, 정의로운 척하는 사람은 많지만 알고 보면 다
쌈마이다. 세상 사람들의 8할은 쌈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쌈마이다.”


그러나 이 쌈마이는 모든 감독들이 탐을 내는 매력적인 배우이다.
인터뷰 도중 대학 동기인 김상진 감독(<주유소 습격 사건> <신라의
달밤> 감독)이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다음 영화에 꼭 출연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흥행 감독에 대한 그의 대접은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꺼져 임마, 나 지금 인터뷰 중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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