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 명하면 할리우드는 쏜다
  • 김영신 (kim0shin@sisapress.com)
  • 승인 2002.02.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쟁·테러 영화로 ‘전시 동원령’에 적극 호응
테러리즘과 전쟁을 선언한 미국의 든든한 우군은 영국과 이스라엘만이 아니다. 여기에 ‘할리우드’를 빼놓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를 거쳐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리스트 소탕 작전’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까지, 할리우드는 워싱턴의 ‘전시 동원령’에 가장 효과적으로 응한 집단의 하나였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매혹적인 전쟁 포르노’라는 평을 받으며 현재 북미 대륙을 달구고 있는 <블랙호크 다운>도 그 한 사례가 될 만하다. 1993년 소말리아 내전 실화를 그린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군 사상 최대인 19명의 전사자를 낸 이른바 ‘모가디슈 작전’을 그렸다. 이 영화는 10년도 채 안된 최근의 실화를 다룬다는 점 외에도, 정치적 맥락을 접어둔 채 피와 살이 튀는 전투 자체의 생생함만을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심지어 ‘아름답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현지 언론은 <글래디에이터>의 명장 리들리 스콧 감독과, <진주만> <탑건> <크림슨 타이드> 등 일련의 군사 대작 영화로 유명한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가 만난 이 작품을 두고 ‘할리우드 장군들의 영화’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 미국 국방부가 아낌없는 지원을 보낸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블랙호크 헬기 4대와 일급 조종사들이 투입된 것은 물론이고, 실제 모가디슈 작전에 참여했던 특공대원들이 자문역과 스턴트맨으로 참여했다. 심지어 촬영지인 모로코에 이들을 무사히 들여보내기 위한 협상에 외교관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블랙호크 다운>은 지난 1월18일 미국 전역의 3천1백여 극장에서 동시 개봉되면서 <반지의 제왕>을 밀어내고 단숨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국내 개봉은 2월1일). 1월30일 현재 미국에서만 약 6천3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이 영화의 흥행 강세는 ‘전시’라는 특수 상황과 미국인들의 애국주의 정서를 날개 삼아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오사마 생포하는 최후의 <람보> 제작할 듯



오랜 세월 할리우드의 가장 두드러진 상품들, 즉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제작한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는 드러내놓고, 때로는 미묘하게 에둘러 애국주의와 미국의 이해를 대변해 왔다. 군복을 입은 인물이 스크린에 등장할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할리우드는 워싱턴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왔고, 현실 세계의 군사 작전이나 첩보 작전에서 미국이 남긴 오류와 실패들은 할리우드에 의해 탈색 또는 윤색되곤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정부와 미국의 연예산업은 ‘메시지’가 아닌 ‘사람’까지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중앙정보부(CIA)나 연방수사국(FBI), 국방부와 항공우주국(NASA)의 전·현직 인사들이 영화 전개의 사실성을 높여준다는 구실로 할리우드 영화에 자문역을 맡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이러한 관계가 할리우드의 태생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영화사학자인 닐 캐블러는 그의 책 <그들만의 왕국:유태인들은 어떻게 할리우드를 만들었나>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동유럽 출신 유태인들이 ‘가능한 한 미국인으로 보이고 싶은 스스로의 열망’ 때문에 미국식 애국주의의 수많은 이미지를 창조해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 초, 할리우드 영화와 텔레비전 제작사 고위 간부들은 베벌리힐스에서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수석보좌관 칼 로브와 회합했다. 워싱턴은 할리우드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조력하기를 바랐고, 로브는 바로 그 ‘영상 군단’을 규합하러 온 참이었다. 이 자리에서 미국 영상연합회장이자 할리우드의 가장 강력한 로비스트인 잭 발렌티는 “할리우드의 창의적인 상상력과 설득 기술로 이 전쟁에 기여하자”라는 말로 화답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할리우드에 도움을 요청하느라 굳이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즈음의 극장가나 텔레비전의 화제작만 일별해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영화관에서는 <비하인드 에너미 라인즈>와 <블랙호크 다운>에 이어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콜레터럴 데미지>가 상영되고 있다. 텔레비전이라고 이런 흐름에서 처지지는 않는다.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제작한 2차 세계대전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즈>, 천만 가구가 넘는 미국인들이 시청한다는 NBC의 백악관 드라마 <웨스트 윙>, B급 액션 스타 척 노리스가 주연해 요즘 한창 탈레반 테러리스트를 쓰러뜨리느라 바쁜 <프레지던츠 맨>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압권은 미라막스 사장인 보브 웨인스타인이 실베스터 스탤론에게 <람보>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만들자고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이 늙은 특공대원(스탤론은 56세다!)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오사마 빈 라덴을 생포해 온다는 내용의 속편에 출연하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이것은 할리우드가 워싱턴에 표시한 동지애의 가장 극진한 사례일 듯하다.
토론토·김영신 통신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