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봄을 틔우는 저 어린 전위 예술가들
  • 글/사진 강운구 ()
  • 승인 2002.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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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봄을 틔우는 저 어린 전위 예술가들



이상하게 되어서 우리는 한 달 남짓한 간격으로 새해를 두 번이나 맞게 된다. 한 해의 마지막은, 잊고 빼먹는 일이 결코 없는 들뜬 망년회와 그 해의 모든 시간은, 양력으로 어수선하게 끝낸다. 다음날 새해부터는 새로운 해의 날들이라 ‘새해에 복 많이…’가 인사로 오가지만 ‘진짜’ 설날은 따로 있다. 얼마 뒤 다시 ‘새해에 복 많이…’를 되풀이하는
‘민족의 대이동’이 이 땅을 휩쓴다. 양력으로 끝내고 음력으로 시작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양력 새해와 음력 새해 사이의 기간은 무엇일까? 그 어중간한 시기를 구제하려면 망년회도 음력으로 하든가, 아니면 설을 양력으로 하든가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이야 사람에 따라서 양력으로든 음력으로든 한번 지내면 그만이다. 그러니 ‘이중 과세’는 아니다. 그러나 망년회 따로 설 따로 지내는 것이야말로 이중 과세이겠다.


  우리 조상들은 설 전의 한겨울에 ‘입춘’ 날을 정해놓고 그날로부터 봄으로 쳤다. 그리고 ‘입춘대길’ 같은 쪽지를 대문이나 집의 기둥에 써 붙이고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했다. 새해의 새봄부터 새날이 시작된다는 것은 실제로나 상징적으로나 다 좋다.




  그런 겨울의 봄날에도 봄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다. 겨우내 눈 속에서도 자란, 억센 보리의 싱그러운 푸른 빛과 두터운
얼음 녹기 시작하는 갯가의 간지러운 버들강아지(사전을 보니 뜻밖에도
버들강아지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마흔
몇 종이나 되는 버드나무의 모든 꽃을 그리 부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갯가의 키 작은 버드나무들의 털북숭이 꽃을 이른다) 는 봄의
전위이다. 갯버들 꽃봉오리는, 갑자기 호된 추위가 덮칠 것에 대비해
털옷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론으로 무장한 전위예술가들처럼 여러 사태에
대비했다. 그래서 비가 와도 젖지 않으며 눈이 와도 얼어붙지 않는다.
전위예술은 고슴도치 같으나 앞장서 봄소식을 전하는 버들강아지는 강아지보다
더 귀엽다. 남보다 먼저 피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스산한 때 여서,
수수한 빛깔의 시각으로 촉감을 느끼게 하는 꽃이어서 더 반갑다. 제
행색을 아마 제 스스로 알고 있기에 빛깔 짙은 여러 꽃들이 피기 전에
서두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몸 사리고 움츠려 있을
때 앞장서 핀 꽃은 아름답다.


  봄을 앞질러 ‘입춘대길’을 쓰려고 마음 가다듬고 먹을
갈 때, 조상들의 가슴에는 봄이 왔을 것이다. 이중 과세고 뭐고를 떠나서,
이미 한 달이 넘게 새해가 지나갔지만, 다시 봄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점은 좋다.


* 강운구의 풍경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마돈나의 노래는 몰라도 마돈나라는 이름은 대개들 안다. 마돈나가 부른 노래 한 곡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사람도 뮤직 비디오와 온갖 스캔들 기사가 만들어낸 그녀의 ‘인상’에는 비교적 익숙하다. 그들에게 마돈나는, 거의 외설에 가까운 선정적 무대 매너와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 상징되는 성적 방종과 동의어이며, 재능 있는 뮤지션이라기보다는 고약한 트러블 메이커쯤으로 받아들여진다. 마돈나의 음악보다 그녀의 삶이 더 큰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마돈나가 어째서 그토록 ‘골 때리는’ 행각을 벌여왔는지가 궁금한 독자라면 앤드류 모튼의 <마돈나>(유소영 옮김, 나무와숲 펴냄)가 제격이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 전기로 필명을 날린 저자는 이 책에서, 댄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중에 단돈 35 달러를 지니고 뉴욕에 입성했던 초라한 출발부터, 그녀가 착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브래지어 하나가 2만 달러에 거래될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까지 마돈나의 개인사를 실감 나게 재현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그녀 속의 무엇이 마돈나를 오늘날 대중 문화의 세계적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했는가에 주목하고, 그같은 성공의 이면에 가려진 마돈나의 이중성과 모순 역시 냉정하게 드러낸다.



마돈나는 일상 생활에서 아이디어를 ‘약탈’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습격’하여 영감을 얻어내는, 탁월한 천재다. 아방가르드를 일반 대중의 입맛에 맞게 변형하는 재능도 뛰어나다. 그럼에도 그녀는 ‘대단히 과소 평가된 음악가’이다. ‘예술적으로도 곡을 쓰는 마돈나의 능력은 뮤직 비디오의 폭발적 인기 때문에 자주 무시되었다.’ 더 결정적으로는, 그녀의 요란한 ‘경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들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돈나는 왜 제 재능을 상대적으로 하찮게 보이게 하는 일들을 벌여 왔는가. 작가에 따르면, 일련의 스캔들은 그녀의 의도에 따라 적극 연출된 것이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던 데뷔 초기, 한 인터뷰에서 “시작부터 난 불량 소녀였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성적으로 헤픈 여자라는 인상을 대중의 뇌리에 각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돈나의 천성 탓도 크다. 그녀는 음악과 사업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했지만, 개인적인 애정 생활에서는 자주 통제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마돈나에 대한 극단적 찬미와 혐오를 두루 껴안는 작가의 결론은 무엇일까. “마돈나가 그림이라면, 아마도 피카소 추상화쯤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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