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늘 깨어 있기를”
  • 이문재 편집위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2.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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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되기의 어려움> 펴낸 이수태씨/‘평범한 생활인의 특별한 발견’ 담아
'그래, 수필은 원래 이런 것이었어’라며 책장을 천천히 넘기게 하는 글들. 최근에 나온 이수태씨의 에세이 <어른되기의 어려움>(생각의나무 펴냄)은 독자를 두 번 놀라게 한다. 위와 같은 독후감이 첫 번째고, 저자가 작가나 교수가 아니라 평범한 생활인이라는 것이 두 번째다. 이수태씨(51)는 매일 경인선 전철을 타고 서울 목동과 부천시 심곡동을 오가는 직장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부천북부지사 지사장. 21년 전 들어간 첫 직장에서 지금까지 근속하고 있다.




동양 고전에 각별히 관심이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이수태씨는 거의 무명에 가깝다 (2년 전,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을 펴낸 바 있다). 국정지표와 태극기가 걸려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나약하며, 그릇된 세상에 대해서는 단호한, 깐깐한 선비의 풍모를 엿보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씨는 “20년 전부터 알고 지내온 출판사 사장이 에세이를 써보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쓴 글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기자는 길게 질문했고, 저자는 짧게 답했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단정한 얼굴이 ‘책 속에 다 있는데 뭘 그리 캐묻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른되기의 어려움>은 글쓰기란 자기 기억과의 대화라는 문학 개론을 새삼 일깨운다.


앞부분에 실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특히 그렇다. 건강보험료 장기 체납금을 해소하기 위해 관할 구역을 둘러보던 그는 30여 년 전, 야학에서 가르치던 여학생 J를 떠올린다. 허름한 지하 셋방에 사는 장기체납자의 이름이 여학생과 같았던 것이다. 철부지 대학생에게 ‘선생님은 고생을 해보신 적이 없지요?’라며 당돌하게 물어오던 여학생. 그는 장기체납자와 야학 제자를 동일시하며, 그녀가 걸어왔을 신산한 30년을 상상하는 것인데,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읽힌다.



시대의 적극성 감시하는 소극적 관찰자



그렇다고 저자가 철 지난 기억을 호출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 <중경삼림>과 <포레스트 검프>를 비교하며 달리기라는 인간의 한계 상황에 담겨 있는 중층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한계 상황은 한계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 극복으로도 구성된다. 달린다는 사실은 이미 매순간의 극복이다’. 저자의 관심사는 폭넓다. 신약 성서나 불교 경전과 같은 인류의 위대한 문헌이 왜 독서 교육에서 제외되고 있느냐고 되묻는가 하면, 어줍잖은 지식인들의 새로운 권력 지향 수단으로 동원되는 ‘사이비 비판’을 비판한다. 통일은 ‘서로 눈치 보고 간섭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자신의 삶과 오래된 책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성찰하는 이씨의 에세이는 윤리적이다. 그는 윤리적 실천이 부족한 것은 부끄럽지만 “그 고삐를 놓치지 않았던 것은 자랑스럽다”라고 밝혔다. 그는 시대의 적극성 혹은 적극적인 인간 행태를 불신하는 소극적인 사람이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단지 소극적인 것, 말하자면 기다리는 것,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만으로도 솔직히 나는 벅차고 감당이 안 된다.”



한 직장을 20년 넘게 다니는 ‘정주민’이지만, 그의 지적 편력은 유목민에 가깝다. 연세대 법학과에 다닐 때만 해도 문학 청년이었던 그는, 이후 서양 철학과 동양 사상으로, 다시 불교철학과 기독교 사상으로 이동해 왔다. 그에게 수필을 써보라고 권유했던 출판사 사장에게 물었더니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이수태 선생은 세속 도시에서 혼자 도를 닦는 분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아버지가 있다. 시골 마을의 요리사 리우 청(리우 페이치)은 아들 샤오천(탕 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올라가 반골 기질이 다분한 지앙 교수에게 거의 반강제로 아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아들의 성공을 위해서는 ‘백’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중국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를 가르친 유 교수로 선생을 바꾼다.







‘샤오천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는가,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기를 원하는가’라는 지앙 교수의 질문에 리우청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한다. 너무나 세속적으로 답하는 리우청의 얼굴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순수하다. 첸카이거의 <투게더>를 보면,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아버지, 도시의 화려함에 현혹되는 시골 아이, 소박한 행복과 세속적 성공이 대비를 이룬다.



세속적 성공의 소박한 기쁨 그려



초기작인 <황토지> <아이들의 왕>에서 민중의 삶을 강건한 자세로 감싸안았던 첸카이거 감독은 <투게더>를 능숙하게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통속적인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인본주의와 사람들의 내면에서 요동하는 감정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첸카이거는 리우청과 샤오천 그리고 지앙의 이야기에 물질적 풍요를 좇는 젊은 여인 릴리를 슬쩍 밀어넣는다. 릴리가 없어도 이야기는 충분하지만, 릴리가 들어감으로써 샤오천의 모든 행동과 감정에는 윤기가 흐른다.



샤오천은 오로지 성공만을 원하는 아버지 때문에 반항을 한다. 하지만 샤오천은 알고 있다. 아버지의 바람이 너무나 순수하다는 것을. 첸카이거는 <투게더>의 이면에는 사회·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국인의 모습이 있다고 말한다. 물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과 음악계의 살벌한 경쟁 등은 현대 생활의 혼란과 정신적인 미약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투게더>의 첫 장면에서 누군가 샤오천을 부른다. 여인이 아이를 낳고 있는 방 앞에서, 그 남자가 샤오천에게 하는 말. “아이가 잘 안 나오고 있어. 네가 한 곡 켜보렴.” 샤오천의 바이올린은 그들을, 그들의 삶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첸카이거는 행복을 이야기한다. “난 영화의 완성도 높은 결말이란 비극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되고 나서 우리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의 해피엔딩은 우리 삶에 에너지를 준다. 행복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장이머우와 마찬가지로 첸카이거는 문화혁명 시대에 오지로 내려가 엄청난 고생을 했던 세대다. 당시에는 비록 고통이었을지라도, 그 덕에 첸카이거와 장이머우는 민중의 삶과 고통, 슬픔과 기쁨을 몸으로 체득했다. 어깨에 힘을 주지 않고 민중의 삶을 곁에서 그려낼 때 그들의 작품은 언제나 위대하다. <투게더> 역시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통속적이면서 위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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