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삼팔광땡데이 선물 줘”
  • 고재열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2.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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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65일 ‘○○데이’ 행진…신세대들, 이벤트에 살고 이벤트에 죽어



지난 2월9일 밤 11시30분 인천시 임학역 인근 공원. 손으로 눈을 가린 여자 친구를 공원으로 데려온 이병훈씨(22)가 손을 뗐다. 그러자 드라마 장면 같은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줄지어선 촛불을 따라 하트 모양을 그리며 폭죽이 늘어서 있고 주변에는 꼬마 전구 2천 개가 반짝였다. 둘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 만든 대형 플래카드도 걸려 있다. 이씨가 3시간이나 들여 준비한 ‘내 여자 친구 공주 만들기’ 작전의 결과는 완전 성공이었다. 여자 친구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요란한 프로포즈를 한 이씨가 유별나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연인들에게 크리스마스와 함께 양대 명절로 자리 잡은 발렌타인데이(2월14일)에는 이런 풍경이 예사로 펼쳐졌다. SK텔레콤의 발렌타인데이 이벤트 ‘러브 투게더’ 행사에 응모해 당첨된 이영희씨(20)는 대형 버스 전체를 사랑 고백으로 도배해서 ‘내 남자 친구 눈물 쏙 빼놓기’에 성공했다. 같은 이벤트에 참여한 이미선씨(26)와 김송화씨(23)는 건물 한쪽 벽면을 덮을 정도의 대형 현수막에 사랑 고백을 해서 남자 친구를 감동시켰다.



공공기관이나 기업뿐만 아니라 동네 호프집까지도 개업식에 내레이터 모델을 동원하는 요즘, 이벤트는 이제 우리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벤트 산업 규모가 연간 1조원에 육박하리라고 본다.



이런 공공 이벤트와 기업 이벤트 외에 요즘은 생활 이벤트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신세대에게 이벤트는 삶을 풍요하게 가꾸는 마법이다. 이들은 군대 가는 친구 ‘삭발식’을 해서 위로하고, 사과할 일이 있는 친구에게 사과·사과야쿠르트·애플파이·사과잼 따위가 들어 있는 ‘사과 종합 선물 세트’를 주며 화해한다.






1년 365일이 모두 이벤트를 위한 날인 이들에게 ‘빨간 날’보다 더 중요한 날은 갖가지 기념일이다. 이성끼리 사랑을 고백하는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3월14일)를 챙기는 것은 기본이다.


요즘은 이성 친구가 없는 사람끼리 짜장면을 먹는 블랙데이(4월14일)와 카레를 먹는 옐로데이(5월14일)를 비롯해 1년 열두 달 ‘데이 행진’이 이어진다. 6월14일은 키스데이, 7월14일은 실버데이(부모님께 이성 친구를 선보이는 날), 8월14일은 그린데이(커플은 산에 놀러가고, 솔로는 ‘그린 소주’를 마시는 날)라고 챙기고, 9월14일은 포토데이, 10월14일은 와인데이, 11월14일은 오렌지데이, 12월14일은 허그데이(연인끼리 껴안는 날)이라며 구색을 맞춘다. 이외에도 11월11일은 빼빼로데이라고 해서 빼빼로를 먹고, 2월22일은 2%데이라며 음료 ‘2% 부족할 때’를 마신다. 4월4일처럼 싫어하는 사람에게 엽기적인 선물을 주는 날도 있다.



이런 공통 이벤트 외에 개인 이벤트도 즐비하다. 이성끼리 사귀기 시작한 날을 기준으로 이벤트가 이어지는데, 만나고 헤어지는 주기가 짧아지면서 최근에는 22일(투투데이), 38일(삼팔광땡데이), 50일(오빵데이) 등 10일 단위로 챙기는 이들도 있다.



추모식 영상물 미리 제작, 죽음도 이벤트화





이벤트가 신세대의 전유물은 아니다. 대중 사회의 반동 현상으로 자신의 삶을 다르게, 특별하게 꾸미려는 사람이 늘면서 기성 세대 사이에서도 이벤트 마니아가 늘고 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서 이벤트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파티족들이 모인 클럽 프렌즈(www.club friends.com)나 시티테마(www.citytheme.co.kr)에는 주말마다 각종 파티가 준비되어 있다.



선보는 것보다 이벤트를 통해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세태를 감안해 결혼정보업체 선우는 이벤트 미팅을 개최하는데, 연중 100여 회의 이벤트가 진행된다. 이벤트에 살고 이벤트에 죽는 이런 ‘호모이벤티쿠스’들은 그때그때 유행을 창조하기도 하는데, 요즘에는 부인이나 애인에게 상장을 주는 상장 이벤트와 깜짝쇼를 벌이는 게릴라 이벤트가 인기가 높다.



생활 이벤트가 늘면서 시장이 형성되자 아예 이를 상품화하는 업체도 생겨나고 있다. 대형 행사를 기획하던 이벤트코리아(www.event. co.kr)는 최근 생활 이벤트 사업을 시작했다. 이벤트코리아는 ‘이벤트 주치의’ 개념을 도입해 연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포즈 이벤트, 아이를 대상으로 한 생일 이벤트, 부모를 대상으로 한 효도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 의뢰인 중에는 애견을 위해 장례식 이벤트를 부탁하거나 추모식 영상물을 미리 제작해 자신의 죽음을 이벤트화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시쳇말로 뿅 가는 일은 여간해선 드물다. 여기저기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책일지라도 나중에 다시 보면 애초의 흥분과 감탄이 공연히 쑥스러워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에 나온 <걷기 예찬>(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은,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다. 그것은 인간을 과객으로, 길 저 너머의 나그네로 변모시킨다.’ 물리적 이동 수단에 불과한 걷기가 돌연 온갖 그럴듯한 의미를 거느린 문화적 행위로 ‘격상’하지 않는가.





최근 선보인 <걷기의 역사>(레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민음사 펴냄)는 한술 더 뜬다. 미문(美文) 취향의 몽롱한 ‘예찬’이 명백한 사례들을 앞세운 ‘역사’로 구체화함으로써 훨씬 풍성한 이야기와 만나게 하기 때문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쓴 루소가 ‘볼로뉴 숲’을 거닐며 품었던 생각을 추체험하게 하는가 하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사실은 ‘걷기의 문학’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걷기 예찬의 역사라고 할 만하다.



‘산책자의 사적 통찰의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 의식’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는 저자는, 걷기를 실천하고 예찬한 역사적 사례뿐 아니라 걷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들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걷기와 생각하기를 결합한 그리스 소요학파 철학자들은 과연 어디를 소요했으며, 런던이나 파리, 뉴욕의 거리가 보행자를 매료시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고 정원에서 걷는 것과 산이나 들에서 걷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등을 이야기한다. ‘자동차를 타고’ 헬스 클럽에 가서 러닝 머신 위에 몸을 맡기는 것은 ‘야외의 상실’을 보상하는 행위로, 시위나 행진은 걷기의 저항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밤거리를 걷는 일의 의미를 탐색하면서는 성 차별의 실례들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걷기는 결국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다. 완벽하게 쓸모 없는 ‘느림의 미학’에 공감하는 이라면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무릎을 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걷기 시작할 것이다. 거창하게 ‘순례’나 ‘방랑’에는 나서지 못할지라도 잠시 잠깐의 산책이나 만보(漫步), 배회 정도는 쉬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 생각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안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안하기는 어렵다. 아무 것도 안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뭔가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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