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촌놈’이 부르는 우울한 귀거래사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5.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드라마 <위기의 남자> 쓰는 이선미·김기호 부부
'이깟 회사 때려치우고 시골 내려가 농사나 지어볼까.’ 틈만 나면 일상에 대한 반란을 꿈꾸는 30∼40대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은 드라마가 있다. MBC가 4월 초 새로 선보인 20부작 드라마 <위기의 남자>(연출 이관희, 월·화 밤 9시55분)가 그것이다.


이 드라마의 큰 얼개는 다음과 같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이동주(김영철)는 아내와 세 자녀가 있는 40세의 평범한 가장이다. 평생을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아온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다. 자기가 뇌물 수수를 거절한 하청업체 사장이 자살한 사건을 보고 나서이다. 사표를 냄과 동시에 그는 오랫동안 꿈꾸어 온 귀농을 실천하려 한다. 그러나 아내 이금희(황신혜)가 시골행을 거부한다. 평범한 아줌마 생활 10년 만에 취업 기회를 잡은 그녀는 남편의 일방적인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에 홀로 귀농을 감행한 동주 앞에 대학 시절 첫사랑 김연지(배종옥)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급속히 불륜의 사랑에 빠져든다.






<위기의 남자>는 일단 10∼20대를 위한 트렌디 드라마만 판을 치던 시간대에 오랜만에 만나는 정통 드라마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중견 연기자들의 변신도 매력적이다. ‘황신혜의 발견’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이 드라마에서 황신혜는 드세고 용감무식하며, 걸음걸이마저 어정쩡하게 촌스러운 아줌마의 모습을 실감 나게 그려낸다.


<태조 왕건>에서 궁예로 천하를 호령하던 ‘카리스마의 화신’ 김영철이 아내가 던진 뚝배기에 맞아 이마가 깨지거나, 가정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며 눈물을 흘려대는 우유부단한 남자로 변신한 모습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 드라마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얼떨결에 귀농한 ‘도시 촌놈’의 시골살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남이 공들여 농사 지은 버섯목을 땔감인 줄 알고 집어 왔다가 드잡이를 당하거나, “모르는 것들이 시골엔 왜 내려와?”라고 동네 주민들에게 배척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귀농자용 교본에 실려도 어색함이 없을 듯하다.



이같은 묘사가 가능한 비결은 부부 작가 김기호(42)·이선미(38) 씨에게 있다. 드라마 속 동주의 체험담은 이들 부부가 실제로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이들이 귀농한 것은 7년 전. 나이는 아래지만 작가 경력은 윗길인 아내 이씨가 먼저 결단을 내렸다. 당시 이씨는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별은 내 가슴에> 등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면서 ‘히트 제조기’라는 별명까지 얻은 인기 작가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드라마 작가를 무시하고 1회용으로 취급하는 방송 풍토에 서서히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더욱이 남편 김씨의 오래된 꿈 또한 ‘발가벗고 감자 심는 것’이었다.



의기투합한 이들이 떠난 곳이 강원도 홍천이었다. 극중 동주네 집처럼 다 쓰러져 가는 데다 수돗물·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는 폐가에 짐을 푼 이들이 맨 먼저 한 일은 융자 1억원을 끌어들여 땅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5천 평에 옥수수, 3백 평에 고추를 심었다. 땅 사고 남은 돈은 탈탈 털어 트럭을 샀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자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1억4천만원으로 불어난 빚뿐이었다. 농사로 1년간 벌어들인 돈은 70만원에 불과했다.






‘사오정 세대’의 욕망과 좌절 잘 짚어내



결국 이들은 ‘쇠고랑을 차지 않기 위해’ 다시 드라마를 쓰게 되었다고 했다. 전기가 들어오는 집을 찾아다니며 텔레비전을 눈동냥하던 시절. 그렇지만 속정 깊은 이웃들과 차츰 섞여드는 재미로 그 생활이 고달프지만은 않았다고 김기호씨는 말한다. <위기의 남자>에 등장하는 천태만상의 시골 사람들, 곧 남자 밝히는 ‘뽕’ 아줌마, 동네 사교 반장 ‘백구두’ 아저씨, 농사일은 뒷전인 채 관청·조합 드나드느라 바쁜 운동권 출신 귀농자 등등은 모두 당시 만난 이웃들이 모델이다(이들 부부는 결국 4년 만에 홍천을 떠났다).



그렇다면 불륜은? 이 또한 몹시 가까운 지인이 겪은 일이라고 이선미씨는 말한다. “누가 드라마를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가?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야비하고 잔인하다. 드라마와 현실이 다른 점이라면, 금희와 달리 내가 아는 사람은 10년간 남편의 외도로 온갖 고생을 다한 뒤에야 비로소 이혼 도장을 찍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의 독특한 강점이라면 남녀 주인공 어느 한쪽으로 감정선이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의논하며 캐릭터를 살려 가기 때문일까. <위기의 남자>는 아내에게 너무 미안한 나머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구는 ‘화성에서 온 남자’와, 자기 곁에 머물러 달라는 속내를 드러내지 못한 채 “그년한테 가 버리라”며 폭언을 퍼 붓는 ‘금성에서 온 여자’의 심리를 공평하게 그려내며 남녀 시청자의 공감대를 획득한다.



귀농 대신 연애담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면서 ‘또 불륜 타령이냐’는 비판이 일부에서 제기되고는 있지만 이들 부부는 <위기의 남자>를 불륜 드라마로 끌고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불륜은 스쳐가는 사건일 뿐, 궁극적으로는 우리 시대의 가정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극중 주인공들이 두루뭉실 재결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는 이들은, 산산이 부서진 사회망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요즘 30∼40대 사이에는 ‘사오정 세대’라는 말이 유행이다. 45세면 정년을 맞는 세대라는 뜻이다. 김기호·이선미 작가는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평생 직장·평생 결혼의 신화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인 이들 사오정 세대의 좌절과 욕망을 영리하게 짚어냈다. <위기의 남자>는 위기의 가정, 위기의 사회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탄인 셈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