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김은남·고재열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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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불확실성의 시대 사는 신세대 신흥 종교
청강문화산업대에 다니는 정우혁씨(20)는 요즘 십자수를 배우고 있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직접 수놓은 쿠션을 선물하고 싶어서이다. 고교 시절부터 그녀를 좋아했던 정씨는 고3 때 대학 입시를 앞두고 종이학 천 마리를 접어 선물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결과는 깨끗한 거절. 이에 정씨는 십자수로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려고 한다.




사회 초년병인 김기남씨(24)는 실연의 상처에서 채 헤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그는 지난해 말 인터넷 연애 게임의 일종인 <러브러브 찌찌뽕>에서 여자 친구(23)를 처음 만났다. 직접 얼굴을 맞댄 적은 없지만 채팅이 오고간 첫날부터 마음이 끌린 김씨는 그녀와 사이버 결혼식까지 올리려 했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한 아바타 의상만도 수천만원어치. 이를 살 사이버 머니를 벌기 위해 김씨는 그야말로 ‘손에 진물이 날 정도로’ 마우스를 눌러대야 했다. 바퀴벌레 잡기 게임에서 벌레를 많이 잡으면 그만큼 사이버 머니가 축적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김씨는 다른 게이머로부터 나이 등 그녀가 스스로를 소개한 프로필 대부분이 가짜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녀의 디지털 사진도 물론 가짜였다.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신세대가 늘고 있다. 연애가 어차피 젊은이들의 전유물일진대 웬 호들갑이냐고 반문하는 기성 세대도 있겠지만, 과거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대학 교수나 학생들은 지난 10∼20년 사이 대학 캠퍼스에 세 차례 회오리가 불었다고 얘기하곤 한다. 1980년대∼1990년대 초반의 ‘이념 바람’, 금융 위기를 전후한 시기의 ‘취업 바람’, 그리고 2000년대 들어 본격화한 ‘연애 바람’이 그것이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를 계기로 운동권이 퇴조하고 학생들의 관심이 ‘개인’과 ‘일상’으로 급속히 쏠리게 되면서 연애가 이들의 지상 과제로 떠올랐다.




지난 5월 초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는 ‘연애·대학인·대학공간’이라는 기획물을 4면에 걸쳐 실었다. 이들의 문제 의식은 오늘날 대학이 ‘학문의 전당’에서 ‘연애 권하는 대학’으로 바뀐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자는 데서 시작된다. “저학년이건 고학년이건, 애인이 있건 없건 연애는 오늘날 대학생들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를 통해 일상의 정치학을 파헤쳐 보고 싶었다”라고 이 신문 편집장인 김성환씨(독어독문과 3년)는 말한다.


이처럼 연애를 다루는 담론은 최근 1∼2년 사이 대학가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심지어는 연애학 강좌까지 등장한 판이다. 지난 학기 서강대는 ‘성과 사랑’이라는 교양 과목을 신설했다. 이 과목을 맡은 정유성 교수(교육학)는 “사랑에 목숨 거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자기를 성찰할 계기를 제공하고 싶었다”라고 강좌를 개설한 배경을 밝혔다. 그가 보기에 요즘 대학생들의 상당수는 거의 맹목적으로 사랑에 탐닉하고 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날리고, 분 단위로 상대방의 동태를 파악하는가 하면, “내 꿈 꿔!”라며 상대의 꿈까지 지배하려 드는 사랑. 그렇지만 이들의 사랑은 순간 집중도는 매우 높되 지속력은 떨어진다.


사랑의 주기가 짧아진 것, 그것은 이들 세대 사랑법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요즘 신세대 연인들의 가장 대표적인 축일은 투투데이, 곧 만난 지 22일 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구세대처럼 만난 지 100일 내지는 3백 일 어쩌고 했다가는 이들에게 ‘엽기적’이라는 놀림을 받기 십상이다.


인터넷이 등장한 뒤로 이같은 경향은 더 가속화하고 있다. 신혜란양(19)은 인터넷에서 새로운 남자를 만난 지 10분이면 ‘자기야’라는 호칭을 쓰고, 30분이면 ‘사랑해’라는 메시지를 쏘아댄다고 말한다. 네트워크 세계에서 신양은 결코 변종이 아니다. 만난 지 2시간 만에 사이버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2시간 만에 이혼하는 커플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 ‘이엑스러브’라는 인터넷 연애 게임을 서비스 중인 (주)위즈덤소프트 한수진 대리의 말이다.


내 감정에만 충실한 ‘휴대폰 폴더식 사랑’


자기 중심성 또한 신세대 사랑법의 특징이다. 정유성 교수는 이들의 사랑을 ‘휴대폰 폴더식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자기 필요에 따라, 자기 마음 내키는 데 따라 감정의 폴더를 여닫는 이들에게 상대방 입장은 부차적인 변수일 뿐이다. 연세대 학생상담소 박남숙 상담원은, 상대에게 공감하는 능력 내지는 상대를 배려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요즘 학생들의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두 남자 또는 두 여자 사이에 이른바 양다리를 걸치고도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해 상담원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곤 한다.


애인을 만드는 방식도 이들은 이전 세대와 구분된다. 이들의 관계망은 더 이상 주변에서 만난 이성, 미팅이나 소개팅으로 만난 이성에 국한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은 이들의 만남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해 주었다. 회사원 임경수씨(28)는 캐나다에 산다는 동포 남학생을 아바타 채팅 게임 <오즈>에서 만나 반년간 사귄 일이 있다. 비록 상대를 직접 만난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임씨는 그를 사귀는 동안 현실 세계에서 남자와 데이트할 때의 설렘·희열 따위를 모두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88쪽 딸린 기사 참조).


사랑에 빠지는 방식도 달라졌다. 기성 세대가 상대를 ‘알고→사귀고→사랑하는’ 순서를 밟았다면 신세대에 와서는 그 순서가 ‘사랑하고→사귀고→알고’로 역전되고 있다고 게임 기획자 김동혁씨는 말한다. 이는 외모(이미지)를 최우선으로 중시하는 요즘 세대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성 세대는 이같은 신세대식 사랑법에 거부감을 표시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사랑 방식에 나타나는 찰나성·즉각성·표피성은 이들이 이전 세대에 비해 특별히 미성숙한 인격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현대 사회의 특성 그 자체가 이들을 순간의 사랑에 탐닉하게 만든다고 정유성 교수는 지적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에 따르면 현대인은 ‘위험 사회’를 살고 있다. 고정된 것, 영원한 것, 안전한 것은 더 이상 없다. 기성 세대가 자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들은 제때 결혼해 자녀를 잘 키우고, 자기가 속한 집단 내지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다르다. 결혼을 하건 안하건, 직장을 갖건 갖지 않건, 이성을 사랑하건 동성을 사랑하건 모든 것은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다.


이같은 상황은 개인에게 자유의 폭을 넓혀 준 대신 안전감을 박탈해 버렸다. 신세대는 더 이상 내가 속한 신분·직장·국적 따위를 밝히는 것만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신세대에게 또 하나의 생활 공간이 되어 버린 사이버 세계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학벌? 성격? 매너?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인터넷에서 상대를 사로잡는 무기는 ‘캠발’(PC용 카메라 사진발)일 뿐이다”라고 정우혁씨는 잘라 말한다.


진지한 순정파보다 숙련된 ‘꾼들’이 인기


더불어 필수인 것이 개성적인 아바타와 감각적인 말솜씨이다. 문화 평론가 서동진씨가 문화 웹진 <컬티즌>에 발표한 글에 따르면, 이 가상의 세계에서는 진지한 순정파보다 숙련된 사랑의 ‘꾼들’이 훨씬 큰 경쟁력을 갖는다(<사랑은 아무나 하나>). 대인관계에 서투르되 인터넷에 능숙한 10대들이 이 세계에서는 오히려 사랑의 전문가로 변신하기도 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제는 남자를 다 알 것 같다. ‘오빠∼, 밥 먹었쪄?’ 하면서 혀 짧은 소리로 애교를 떨면 5분 안에 두세 명은 쉽게 넘어온다”라고 연애 게임에서 만난 한 10대 여학생은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신세대가 매달리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배은경씨(서울대 강사·사회학)가 지적하는 대로, 사랑이야말로 나의 존재 의미와 나의 진정한 자아를 확인시켜 줄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남자에게 “네가 나를 알아?”라고 울부짖는 영화 <후아유>의 여주인공은 이들 세대의 감수성을 정확하게 대변한다(87쪽 상자 기사 참조). 이들에게 사랑해 달라는 말은 곧 나를 알아 달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새로운 세기의 신흥 종교라 할 만하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들은 사랑에서 비로소 유토피아를 발견하고 구원을 얻는다. 종교에 막 귀의한 신도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막 빠져든 연인들은 식상하고 낡은 옛것들과 결별하면서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지각한다.


문제는 이것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랑이 중요해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사랑이 불가능해진 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역설이라고 울리히 벡은 간파한다(<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정상적인 혼란>). 급증하는 이혼율은 표면적인 증표에 불과하다. 사랑 문제를 깊이 천착해온 미셸 푸코·앤서니 기든스 등은 현대 사회 그 자체가 사랑을 지원하게끔 구조화해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일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언제라도 일터를 옮길 수 있는 이동성과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그래야 몸값을 올릴 수 있다고 부추기는 노동 시장은 개인이 사랑에 헌신할 시간과 공간을 허용치 않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될수록 상황은 더 복잡하게 꼬여 간다. ‘사랑을 위해 기회를 버리던’ 엄마 세대와 달리 신세대 여성들은 더 나은 기회를 위해 기꺼이 사랑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더욱이 가부장적인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가 충돌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라면, 사랑을 위협할 만한 ‘지뢰’는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럼에도 사랑은 오늘날 신세대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 거의 유일한 도구이다. 입시의 중압감 때문에 자기를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랑에 빠져드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연세대 박남숙 상담원은 이들이 연애를 하게 되면서 비로소 다른 사람과 의사 소통 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학연·지연·혈연 따위 기존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관계의 친밀성’ 그 자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이들의 사랑법은 고무적이다. 어찌 보면 이들은 사랑을 통해 기성 세대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기든스의 말마따나 ‘사적 영역에서 확장되고 있는 이같은 민주주의의 싹’을 체제 내로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 미래 사회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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