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인가, 신명인가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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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악마 현상 분석/“집단주의 표현” “21세기 공동체 의식 분출” 시각 갈려
"붉은 옷을 똑같이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부름이라도 있었다는 듯이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이상한 구호를 외쳐댔다. 그것은 바로 축구 신(神)을 향한 것이었다.”(<휴스턴 크로니클> 6월19일자)


종교적 열정을 방불케 했던 한국의 길거리 응원. 이를 놓고 엇갈린 시각이 나오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집단 히스테리를 읽어내고, 또 다른 이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전국민의 8분의 1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온 나라를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은 것은 개국 이래 처음 있는 대사건이다. 승리가 확정된 순간 생면부지인 사람끼리 얼싸안으며 펄펄 뛰고, 누군가 ‘대∼한민국’ 큰소리로 한마디만 선창하면 거리를 걸어가던 수백 명이 조건반사라도 하듯 ‘세~계최강’ 구호로 화답하고, 자동차·버스·오토바이·경찰차, 심지어 땅밑 지하철마저 ‘빠방∼빵 빵빵’ 4박자 경적을 울리며 온 나라를 질주하는 이 거대한 ‘광기’ 앞에서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이것이 건강한 광기냐, 병든 광기냐 하는 것이다. 먼저 칼을 빼든 것은 박노자 교수(캐나다 오슬로 국립 대학·한국학)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출판부) 같은 노작을 통해 한국에 애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아 온 이 귀화 러시아인은 최근 <오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세종로를 벌겋게 물들인 군중을 보며 집단 히스테리를 느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거리 응원에 나선 인파가 동원된 군중이 아니라는 사실은 박교수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스포츠를 국가 대 국가의 대결로 몰고 가는 분위기 자체가 불온하다고 비판했다. 국가 또는 민족의 이름으로 노점상 철거·강제 징집 등 온갖 폭력과 차별이 정당화하고 계급간 갈등이 은폐된다면 그것은 곧 위로부터 만들어진 허위 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뇌 없는 공룡의 집단 히스테리”


집단주의는 배타성·폭력성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축구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가는 주변으로부터 왕따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 월드컵 기간의 분위기였다.
더 큰 문제는 집단주의가 이성과 공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인 박현수씨(재능대 교수)는 응원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를 보며 ‘뇌 없는 공룡’을 연상했다고 말했다. 월드컵과 같은 기간에 치러진 지방자치단체 선거 결과가 이같은 절망감을 더했다. “올해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 투표제가 시행된 첫 해이다. 젊은 세대가 그토록 기성 정치를 혐오하고 새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이번만은 반드시 투표에 참여해 판을 바꿨어야 했다”라고 비판하는 박씨는, 붉은악마로 표출된 에너지 또한 허상이라고 보았다. 순간적 희열을 위해서는 온몸을 바치지만 지속적 관심이 필요한 분야는 가볍게 외면하는 것이 이들 집단의 특성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붉은악마 현상에 집단주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식인의 오만이나 다름없다고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는 잘라 말한다. 만약 이 현상을 정치적으로 조작하려는 기미가 있다면 지식인이 나서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자발적으로 형성된 축제 분위기에 재를 뿌리는 것은 병적인 강박증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동물적 본능의 발로로 붉은악마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독특한 주장을 폈다.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을 무리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면 홀로된 동물은 방어적이고 위축된 행동을 보이게 된다. 김씨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이 바로 이랬다. 지난 100년간 한국인은 일본에 당하고 분단을 겪으며 지연·학연·혈연으로 갈가리 찢겨 소외된 채 살아 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모든 종류의 단절과 분열을 한순간에 뛰어넘는 계기, 곧 월드컵이 주어졌다.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생물학적 본능에 가까운 동질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폭력 행위가 거의 없고 경기가 끝난 뒤 거리 응원단이 휴지를 줍는 행위도 그가 보기에는 ‘종족 보존 본능’이나 다름없다. 자기가 속한 종족(집단)이 욕먹는 일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는 보호 본능이 ‘세계도 놀란 질서 있는 응원 문화’를 낳은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졸전을 펼쳤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이번 월드컵에 사람들이 열광한 비밀을 ‘자기 발견’에서 찾는다. ‘프리킥과 페널티킥도 구별 못하는’ 사람까지 거리 응원단에 대거 몰려든 데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단순히 축구에 열광한 것이 아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애국심을 표출하고 싶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은 이를 한 번도 밖으로 표출해 보지 못했다. 개개인이 아무리 잘났을지언정 한국인은 외세, 군사 독재 정권에 이어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첩첩이 쌓인 집단적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팀이 유럽의 강국 선수들을 상대로 결코 주눅 들지 않는 정신력과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콤플렉스가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곧 유럽 선수들과 몸싸움을 하며 ‘어, 내가 안 밀리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이천수 선수처럼, 대중 또한 선수들을 열렬하게 응원하는 행위가 세계의 찬사를 끌어내는 것을 목도하며 ‘어, 우리 것이 통하네’‘내 안에 이런 것이 있었네’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응원 열기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혼돈의 광장에서 폭발한 자긍심


비록 계기는 월드컵이었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는 이같은 집단적 에너지를 분출할 만한 물적 토대가 성숙하고 있었다고 최원기 박사(한국청소년개발원 연구원·사회학)는 지적한다. 이데올로기 시대 종식 및 세계화 시대 도래, 외환 위기, 인터넷 환경 등장. 이처럼 급격한 변화를 거치는 동안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 대 개인주의, 세계화 대 반세계화, 현실 공간 대 가상 공간이 뒤죽박죽 섞인 혼돈의 공간이었다.


길거리 응원단을 보라. 탁 트인 광장에서 살갗을 부비며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이들은 경기가 끝나는 순간 각자 밀폐된 공간에서 인터넷을 즐기는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태극기로 두건이며 치마를 만들어 입고, 안정환 선수의 ‘오노 세리머니’에 열광하던 이들 또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맥도날드나 KFC를 거리낌없이 드나든다.


그러나 이같은 혼돈이야말로 붉은악마 현상을 탄생시킨 원동력일 수도 있다. 좀더 다변화한 사회, 다시 말해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고 놀이 대상 또한 다양해져 있는 사회라면 이런 식의 대규모 응원이 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김문겸 교수(부산대·사회학)는 지적한다. 노는 것을 죄악시했던 기성 세대와, 노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되 입시에 찌들리고 마땅한 놀이 대상이 없어 스트레스를 받던 신세대. 이들이 마침내 거리 응원의 한복판에서 만나 ‘21세기형 신명의 문화’를 창조하고 만 것이다.




‘일단 신바람이 났다 하면 목표치를 초과 달성해 버리는’ 폭발력을 발휘하는 한국적 신명 문화는 독창적이면서도 역동적인 한국만의 응원 방식을 창출했다. 세계화의 첨병으로 손꼽히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마련해 준 놀이터에서 가장 반세계화적인 방식, 곧 가장 한국적인 방식의 응원 문화가 등장해 세계적인 각광을 받은 것은 이번 대회가 낳은 역설 중의 역설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이렇게 자랑스러운 것은 처음이다!’ 이는 월드컵 기간에 인터넷 게시판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문장이기도 하다. 현대사 이후 처음으로 이들이 갖게 된 자긍심이 성숙한 사회로 가는 원동력이 될지, 폐쇄적인 민족주의·국가주의로 빠지는 족쇄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최선기 박사는 이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편다. 길거리 응원에 모여든 사람들은 과거의 전체주의적(totalitarianism) 집단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들은 집단은 집단이되 획일성을 배제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전일주의(holism)적 집단이라는 것이다. 문화 평론가 조형준씨 또한 이들을 고전적인 군중(群衆) 대중(大衆) 공중(公衆) 민중(民衆)과 구분하자고 제안한다(<시사저널> 제661호 참조).


세계화 무대에서 반세계화적 응원 문화 펼쳐


이들은 지연·혈연·학연에서 자유로운, 말 그대로 하나의 개인들일 뿐이다. 나치나 훌리건처럼 전통적인 전체주의 집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 약자, 곧 여성·노인·청소년·외국인 노동자들이 붉은악마의 주요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예감케 한다. <제국>의 작가 네그리의 개념을 빌리자면, 대중의 시대를 넘어 ‘다양한 개인의 자유로운 연합’ 곧 다중(多衆)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셈이다.
선택은 이제 이들 다중의 손에 달려 있다. “우리가 가면 그게 곧 길이다.” 이것이야말로 붉은악마가 한국 사회에 남겨준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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