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시대 다음은 야만의 시대인가”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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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식씨, ‘우리 안의 파시즘’ 비판
7월 말 간행될 문부식씨(43·계간 <당대비평> 편집위원)의 새 책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삼인) 맨 앞장에는 이런 헌사가 붙어 있다. ‘장덕술군의 영정에 바친다.’


장덕술. 이는 1982년 3월18일, 당시 고신대 학생이던 문부식씨가 부산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을 때 그곳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질식사한 청년의 이름이다. 이 사건으로 문씨는 법정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그 뒤 민주화 열기를 타고 석방되어, 1980년대 반미 자주화운동의 아이콘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인생 역정을 겪었다.





올해로 20주년.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이미 망각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알아주는 진보 매체의 편집주간이자, 시집 한 권(<꽃들>)을 펴낸 시인이며,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살배기 딸아이를 둔 평범한 가장인 문씨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더 이상 없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다름아닌 그 자신이다. 새 책을 통해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나섰다. ‘나는 방화범이요, 살인자였다.’ 돌이키자면 그가 고의로 장씨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참혹한 학살의 시대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곧 광주 학살을 일으킨 미국과 전두환 군부의 ‘더러운 결탁’을 고발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열혈 신학대생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인명이 스러진 뒤 그는 스스로를 수없이 책망했다고 했다. 그는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속죄를 대신했다. 10년 가까운 감옥살이 또한 그는 단 한번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참회에 가까운 그의 이같은 자기 고백은, 그러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그가 새 책 출간을 앞두고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른바 5·3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에게 자성을 촉구하자 상황은 더 꼬여 버렸다(77쪽 상자 기사 참조).


사실 동의대 사태는 그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책 집필을 마무리할 즈음 민주화보상운동심의위원회가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파문이 확산되자 그는 진실을 제대로 알아보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출판 일정을 뒤로 미룬 채 학생·경찰측 주장과 법정 기록 파고들기를 두 달. 그는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경위가 어찌되었든 자기들로 인해 무고한 경찰관 7명이 희생되었다면 그에 대해 사죄부터 하는 것이 살아 남은 자의 예의였다. 그런데 학생들은 사건 직후부터 오늘까지 외부에만 사태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물론 계획적 살인범으로 몰려 사회적 오명을 뒤집어썼던 학생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명예를 회복하는 데도 순서가 있다. 그는 의문사한 한총련 간부에 대해 정부가 민주화 보상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한총련=이적 단체’라는 규정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의대 사건은 경우가 다르다. 애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면 희생자들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그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규명한 다음 비로소 민주화 보상을 받아도 늦지 않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말한 ‘한 줌의 도덕’이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어찌 보면 순진한 이상론처럼 여겨진다. 그의 주장이 소개된 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 게시판에는 ‘참회하려면 혼자 조용히 하라’ ‘개인의 감회로 다른 역사적 사건까지 호도하려 들지 말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그가 개인적인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광기의 시대’를 들먹인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모두가 전두환이고 노태우”


그의 의문은, 이른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고 망월동 묘지가 국립묘지가 되었는데도 왜 세상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는가에서부터 출발한다. 1980년대가 특수한 광기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일상적인 야만의 시대라고나 할까. 5공 정권의 출범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이 여전히 정·관계 요직을 꿰차고 있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짓밟히고 있으며, 학력·지역·성별에 따른 차별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데도 일반 대중은 이를 구경만 할 뿐이다.


그는 이같은 구조가 온존하는 이유를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 찾는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는 ‘1980년 5월 광주’가 고립된 것은, 군부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군부를 옹호한 미국은, 따라서 그에게 타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두려움 너머에 가려 있던 ‘민중의 욕망’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주도한 조국 근대화의 단맛에 빠져 있던 민중. 이들은 1980년 바로 그때 박정희가 약속했던 낙원을 대신 실현시켜 줄 과단성 있는 권력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곧 우리는 폭력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위해 야만을 용인한 것이 아닐까. 이에 그는 마침내 ‘우리 모두가 전두환이고 노태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고 그가 ‘우리 모두는 역사의 가해자요 희생양’이라는 식의 면죄부를 발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는 광주 시민들에게 발포한 공수부대원을 가리켜, 국가의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직무를 수행하는 행위야말로 파시즘을 가능케 한 원천이라고 맹공한다. 폭력 없는 사회, 이성적인 사회는 ‘국가를 거부할 줄 아는, 자율적인 개인’이 출현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몸 담고 있는 <당대비평>이 2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해 온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안의 파시즘’론에 대해서는 민중을 적으로 간주하는 논리라는 둥, 비과학적이라는 둥 운동권 내부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는 과학적인 운동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이보다 그는, 얻어맞는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한 사람의 개체로 느끼는 심성이 결여되어 있는 한, 학살 책임자를 법정에 세운 것만으로 역사를 다 ‘청산’한 것인 양 자신이 저지른 비겁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행위가 반복되는 한, ‘야만과 광기의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시인이자 혁명가다운 감수성으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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