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고? 그냥이야!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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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사이버 문화 총정리 ? /온라인 세계 평정한 아햏햏 열풍



어원도 의미도 불분명한 '아햏햏’의 폭발적 인기, 선거관리위원회의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폐쇄 조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이른바 강준만-진중권 논쟁…. 세계적인 정보 기술(IT) 강국이라는 수식어가 무색치 않게끔, 대한민국의 사이버 공간은 올 한 해도 새로운 흐름과 논쟁들로 들끓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문화 현실로 우리 시대를 압박하고 있다.


이에 <시사저널>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사이버 문화의 최전방에 서 있는 강사들을 초빙해 벌이는 문화 강좌 ‘사이버 공간의 악동들’을 3회에 걸쳐 지상 중계하기로 했다. 강좌는 ①아햏햏과 사이버 문화(강사:문화평론가 조희제씨) ②사이버 논객의 계보학(강사:변희재 <대자보> 기획위원) ③게시판 논쟁 문화(강사:조지혜 하자센터 작업팀장) 순서로 이어진다. 강좌 및 난상 토론에 직접 참여하고 싶은 이는 11월21일∼12월12일 매주 목요일 7시 서울 종로구 낙원동 민예총 사무실을 찾으면 된다(문의 02-739-6851).




2001년이 ‘엽기’의 해라면 2002년은 ‘아햏햏’의 해였다. 어원도 의미도 알 수 없고, 심지어는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도 헷갈리는 이 단어는 순식간에 네티즌을 사로잡았다.



아햏햏의 뜻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는 하늘 아래 없다. ‘설명하려 할수록 설명하기 힘들어지고 본뜻과 멀어지는 신기한 단어’가 바로 아햏햏이다. 네티즌들은 기쁠 때, 화날 때, 이해할 수 없을 때, 어떤 사태나 자신의 감정을 꼭 집어 설명하기 어려울 때 무차별로 이 단어를 살포한다. 이를테면 기막히게 좋은 영화를 보았을 때나 반대로 형편없는 영화를 보았을 때 똑같이 내뱉는 말이 “참으로 하오”이다. 정치권 철새나 쓸 만한 지도자 모두를 지칭하는 말 또한 ‘아햏햏한 정치인’이다.



그렇다면 아햏햏은 무의미한 말장난인가? 언뜻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이를 국어 파괴라고 몰아붙인다. 그러나 문화 평론가 조희제씨는 햏자(아햏햏의 도를 수행하는 자)를 자처하며 ‘햏자도원’ 도래를 염원하는 이들의 행태가, 선문답을 일삼으며 노장사상을 추구하던 옛 선사들과 닮았다는 데 주목했다. 실제로 이들은 ‘도를 도라고 (입 밖에 꺼내) 말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주장한 노자처럼 아햏햏은 아햏햏일 뿐이라며 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도인 이미지’ 장승업·신 구가 최고 우상



이들이 섬기는 최고의 우상 또한 술병을 끼고 지붕에 올라앉은 채 세속을 초월한 눈빛을 보여주던 장승업(좀더 엄밀히 표현하자면 배우 최민식이 연기한 장승업의 이미지) 내지는 다 떨어진 밀짚모자를 쓰고 거룻배에 누운 채 “너희가 게 맛을 알아?”라고 일갈하는 도인 이미지의 탤런트 신 구이다. 세상을 달관한 듯한 이들에게 열광하며 자들은 “세상이 뭐라 하든 나는 나! 아햏햏이오!”를 자신들의 캐치프레이즈로 삼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노장사상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단지 하나의 수단으로 선문답 방식을 차용한다. 그렇다면 왜? 조희제씨는 난장판이 된 인터넷 게시판 문화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인터넷에서 설득과 토론이 불가능해진 지는 이미 오래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페미니즘·동성애 따위 주제를 놓고 밤새워 토론해 보아야 세상은 변하지 않고 논쟁 또한 되풀이될 뿐이라는 것을 이들은 알아채 버렸다. 이제 이들에게 인터넷은 ‘소음으로 가득한 무의미한 공간’일 뿐이다. 이들은 무의미한 논쟁에 무의미한 언어로 맞선다. ‘아햏햏’‘아햏햏’이라고.



흥미로운 것은, 아햏햏이 문자 언어라기보다 이미지 언어라는 사실이다. 아햏햏이 아무 데서나 쓰인다는 점 때문에 전라도 사투리 ‘거시기’를 연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햏햏은 거시기와 달리 일상에서 쓰이는 말이 아니다. 은 모니터 상에서 비로소 위력을 발휘한다. 이 무의미한 단어가 시각적으로 반복될 때 논쟁은 힘을 잃는다.



따져보면 아햏햏이 처음 생겨난 모태인 ‘디씨인사이드’부터가 그랬다고 조희제씨는 지적한다. 디지털 카메라에 대한 최첨단 정보를 모아놓은 이 사이트는 언어보다 이미지로 의사를 소통하는 데 더 익숙한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이성이 충돌하는 인터넷 게시판에 절망하고 지친 이들은 이곳에서 영혼의 안식처를 발견했다. 이들이 창조한 상징 언어가 아햏햏이었다.



그러나 조희제씨의 강의가 끝나고 이어진 난상 토론에서 참석자 일부는 아햏햏의 이면에 숨겨진 폭력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한 남성 참석자(29)는 얼마 전 디씨인사이드 갤러리에 자기 여자 친구 사진을 올렸다가 ‘개그우먼 박○○ 닮았다’ ‘당장 헤어져라’ 같은 리플 세례를 받고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도인인 양 행세하고 말투조차 ‘경하하오’처럼 점잖은 하오체를 쓰다가도 때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공격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햏햏족이다.



이를테면 서울대생은 과외비를 40만원 이상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서울대생 커뮤니티나 일본을 흠모한다고 밝힌 한 중학생의 개인 홈페이지는 이들의 떼거리 공격을 받아 초토화하고 말았다. 이들은 공격할 때 논리적인 글을 동원하지 않는다. “고구마 장사 하려는데 100원만 주세요”처럼 밑도 끝도 없는 문장을 한없이 실어 날라 상대방 서버를 다운시켜 버리는 것이 이들의 공격 방식이다.



이들의 호전성을 잘 아는 네티즌들은 때로 이들을 ‘용병’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족의 특성을 기막히게 간파한 만화 <폐인의 세계>를 인터넷에 연재한 김 풍씨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풍자한다. 이명박 시장이 히딩크를 접견하며 자기 가족을 대동한 것에 분노한 붉은악마가 “맹박(명박)이 아들 좀 혼내 주세요”라고 청탁하면 아햏햏족은 “후훗, 아예 시청을 폭파해 주겠소!”라며 한 술 더 뜬다.



만만한 상대만 공격하는 ‘마초’ 행태 보이기도



단 공격하되 ‘쎈 놈’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이들의 불문율이다. 특히 웬만해서는 다운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서버를 구축한 곳들은 공격 대상에서 제외된다. 서버를 다운시키지 못하는 것은 이들에게 곧 패배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만만한’ 상대로 생각하는 것은 여성·노약자 같은 정보화 시대의 약자들일 수 있다(한 예로 이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주장하는 집단이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여대의 커뮤니티를 집중 공격하는 양태를 보이곤 한다). 이들에게 마초(남성우월주의자) 내지는 반달리즘(약탈·파괴 행위) 딱지를 붙이는 비판자들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햏햏 열풍은 온라인, 나아가 오프라인 문화의 미래를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조희제씨에 따르면, 아햏햏을 반복하며 대화를 닫아 버린 이들야말로 역으로 소통을 열망하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무가치한 소음투성이처럼 여겨지는 세상. 이 속에서도 이들은 진정한 소통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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