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 있지만 완고한 ‘빈 사운드’의 자존심
  • 노승림 (월간 <객석> 기자) ()
  • 승인 2003.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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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내한 공연 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는 3월 말 내한 공연을 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빈 필)는 베를린 필과 종종 비교된다. 세계 정상을 두고 선두를 다투는 경쟁 관계라는 점을 빼고는 두 단체는 너무도 다르다. 유사한 혈통에 같은 언어를 쓰고 지역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데도 정작 무엇 하나 닮은 점이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베를린 필이 ‘독재적 분위기’라면 빈 필이 보여주는 개성의 핵심은 바로 ‘민주주의’이다.


무엇보다 빈 필은 음악감독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오케스트라와 차별된다. 즉 사령관 없는 군대인 셈이다. 빈 필측은 “우리는 단 한 명의 지휘자보다 동시대 모든 지휘자들의 음악을 다양하게 만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밝히고 있다.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상임지휘자나 음악감독이 수행하는 행정적인 역할은 운영위원회가 담당하는데, 그 구성원들은 빈 필 단원 가운데 투표로 선출된다. 어느 공연에 어떤 지휘자를 세울 것인가에서부터 단원들의 급여에 이르기까지 악단과 관련된 모든 사안이 단원들의 동의 절차를 거친다.



이처럼 민주적인 시스템이 오스트리아 왕정이 건재하던 18세기 중엽 창단 시절부터 정착되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842년 빈 필 창단을 주도한 궁정 음악감독 오토 니콜라이가 주창한 ‘필하모닉 이념(Philharmonic idea)’에 근거한 이 자치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악단의 행정적·예술적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필하모닉 이념’의 원칙은 너무도 확고하게 지켜져서 창시자인 오토 니콜라이조차 이 원칙에 위배되어 종국에는 빈에서 추방되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오케스트라’를 표방하는 빈 필은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텃세가 심한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빈 필은 오로지 빈 출신만 단원으로 뽑는다. 빈에서 태어나, 빈에서 자라고, 빈에 있는 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받은 이만 들어갈 수 있다. 구성원의 혈통적 제한은 1997년 원칙적으로 철폐되었지만 아직도 빈 필의 단원들은 100% 빈 출신이다.



전통 악기 고수하는 ‘지역색’으로 유명



빈 필의 지역색은 단지 단원들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들은 연주하는 악기 또한 빈 전통 스타일을 고수한다. 가령 그들이 사용하는 빈 호른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프렌치 호른보다 소리가 더 부드럽다. 오보에·트럼펫·팀파니까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재질과 모양이 다른 빈 고유 악기를 사용한다. 당연히 다른 악단들과 소리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런 빈 필만의 특별한 음향을 음악계에서는 ‘빈 사운드(Wien Sound)’라고 일컫는다.



마지막으로, 빈 필은 여성 단원을 두지 않는다. 이 또한 1997년 철폐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고수되고 있는, 빈 필을 세계에서 가장 특이하게 만든 조항이다. 창단 당시 종교적 계율에 따라 여성 채용이 금지되었던 전통이 오늘날까지 불문율로 이어져온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악단이라는 명성을 무색하게 만드는 이 ‘금녀 칙령’은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들의 비판 대상이 되어왔다.



1997년 남성 하피스트가 부족하자 객원으로 여성 하프 주자를 임명해 화제를 모으기는 했지만, 당시 빈 필은 콘서트 실황 중계 화면에 그녀의 얼굴이 비치지 못하도록 방송사에 적극 요청하기도 했다. 기록이 깨진 것은 올해 초였다. 전세계에 위성 중계된 빈 필의 신년 음악회는 사상 처음으로 여성 단원의 연주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에 내보냈다. 주인공은 비올라 주자 우르줄라 플라이힝어였는데, 알고 보니 그녀 또한 아직 객원 멤버였다.



빈 필의 내한 연주는 올해로 다섯 번째. 최초의 내한 공연은 1973년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로 이루어졌다. 변변한 연주홀이 없어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연주하는 동안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기차 기적 소리에 지휘자가 얼굴을 찡그렸다는 웃지 못할 일화를 당시 내한했던 빈 필의 최고 연장자 베르너 레젤(첼로)이 이번에도 찾아와 증언할 것이다. 이번 내한은 예술의전당(3월31일), 상암경기장(4월1일), 통영시민문화회관(4월2일)에서 연달아 이루어지는데, 빈 필 내한 이래 최초의 지방 공연이자 해외 첫 야외 공연을 기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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