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외딴방>의 신경숙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5.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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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소설 <외딴방> 펴낸 신경숙씨…세상 향한 원고지 위의 고해성사
누구에게나 외딴방이 있다. 외딴방은 비밀이다. 발설할 수 없는 깊은 상처다. 삶의 모질음, 삶의 쓰라림, 삶의 전망 없음은 외딴방 때문이다. 외딴방에서 나온 삶은 서성거린다. 그곳에 다녀와야 될 것 같지만 무섭다. 외딴방은 삶의 도처에 허방을 만들어 놓는다. 삶은 거기에 수시로 빠진다. 외딴방은 과거가 될 수 없다.

<풍금이 있던 자리> <깊은 슬픔> 등의 작품집에서, 신경숙 소설 미학의 원체험에 목말라하던 독자들에게 최근 그가 펴낸 새 장편소설 <외딴 방>(전 2권·문학동네)은 ‘한 바가지의 우물물’을 건넨다. 신경숙 문학의 ‘눈부신 연민과 처연한 아름다움’이 길어올려지는 깊은 우물이 바로 <외딴방> 속의 ‘외딴방’인 것이다. 어쩌면 ‘외딴방’은 신경숙 문학의 원죄였는지도 모른다.

원죄를 고해하는 음성은 떨린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여명기의 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라는 장 그르니에의 한 문장을 소설의 입구에 달아놓은 것이라든지, 소설의 맨 첫 문장이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인 것도 그 때문이다.

서른일곱 가구가 붙어 사는 닭장집의 외딴방

약속이 있어서 택시를 타고 나가다가도 문장이 떠오르면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그 문장을 이을 정도로 집을 떠나서는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는 신경숙씨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제주도로 날아간 것도 그 때문이리라.

<외딴방>은 두 개의 소설이 번갈아 진행된다. 하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이 쓰고 있는 소설(과거)이다. 전자는 후자에게 갈 수 없음, 갈 수 없었음을 변호한다. 후자가, 소설 속의 ‘나’가 16년 만에 찾아가는 외딴방이다.

‘나’는 78년 유신 말기, 시골에서 상경해 외사촌·큰 오빠와 함께 살면서 공장에 들어간 뒤 산업체 특별 학급에 입학한다. 낮에는 음향기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 5시면 산업체 특별 학급에 나가 공부한다. 그때 ‘나’의 꿈은 소설 쓰기다. 큰 오빠와 외사촌, 후에 작은 오빠까지 함께 살게 되는 구로공단의 작은 단칸방이 외딴방이다.

서른일곱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닭장집’. 거기에서 ‘나’는 희재 언니를 만난다. 외딴방에서 희재 언니가 죽고 ‘나’는 그 이후 죄의식에 시달린다. ‘나’는 외딴방에 갇힌 것이다.

<외딴방>의 표층은, 희재 언니의 죽음을 둘러싼 원죄 의식의 고백이지만, 그 아래를 흐르는 심층은 ‘우물 속에 빠뜨린 쇠스랑’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다시 집에서 섬으로 옮겨가면서,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성숙을 거듭한다. 그 성숙의 상징이 우물 속의 쇠스랑이다. 아무도 모르게 빠뜨린, 자기의 살에 박혔던 쇠스랑은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던 ‘외딴방’과 하나가 된다.

섬에서 소설의 마침표를 찍으면서 작가는 말한다. “이 해안이 나의 글쓰기 안으로 들어올 것 같은 예감이다”라고.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이 글 속엔 수많은 ‘나’가 등장하지만 이 글은 소설이므로 형식상의 일인칭이다. 그래도 남아 있는 ‘나’가 있다면 이젠 ‘그’가 되어 세상에 섞이길 바란다.” 우물(‘나’)이 제주도 바다(‘그’)로 확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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