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김응수 감독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 전찬일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7.03.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운동권 출신들의 후일담…차분한 영상 처리 돋보여
“어떤 방식으로든 80년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 이 영화를 통해 80년대라는 한 시대를 지나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싶다. ”

이 작품이 ‘후일담 영화’라고 규정되는 것은 멋부리기가 아니다. 감독은 물론 김선재를 제외한 출연진과 등장 인물의 배경을 고려하면 ‘운동권’이라는 수식어가 덧붙는 것도 그렇다.

모스크바를 무대로 러시아 스태프를 동원해 완성한 운동권 후일담 영화라! 획일·순응·타협·천박함 따위가 속성인 한국 영화 풍토에서 이같은 작품을 볼 수 있다니 참으로 신선하다.

김응수(31).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89년), 서울예술전문대학 영화과 1년 중퇴(90년), 모스크바 국립 영화학교 수학(91~95년), 단편 영화 <님> <안단테 칸타빌레> <이방인> 세 편. 그리고 장편 데뷔작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언뜻 김홍준 감독과 그의 첫 작품 <장밋빛 인생>이 떠오른다. 그러나 사뭇 다르다. 김홍준은 태흥영화사라는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고 가리봉동의 허름한 심야 만화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80년대를 드라마로 추체험하려 했다.

반면 김응수는 4억여 원이라는 제작비를 가족을 비롯한 지인들로부터 어렵게 마련해서는, 오늘의 시점에서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과거를 응시하려 한다. 그에게는 허구로서의 드라마보다는 허구와 비허구의 넘나듦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등장 인물의 이야기를, 때로는 출연진의 담백한 자기 고백을 지켜본다. 빛 바랜 흑백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명을 사용한다.

서른을 눈앞에 둔 그들은 모두 심리적으로 혹은 실생활에서 방황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 근저에는 운동 시절 의문사로 처리된 동료 진호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는 자책이 깔려 있다.

관객에게 감정적 동요보다 지적 판단 요구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중기(김중기), 외교관으로 겉보기에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현실적인 성준(황성준), 트로츠키주의자임을 표방하다 결국은 권총 자살하는 이상주의자 기웅(박기웅), 저들과는 차원이 다른 쓰라린 이력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며 성실하고 과묵하게 살아가는 완구(강완구), 중기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의 방황과 회의를 안타까워하고 힘겨워하는 선재(김선재), 학창 시절 꿈을 저버린 채 외교관의 아내로서 짜증스럽게 사는 경주(최경주), 기웅의 자유분방한 애인 은정(강은정).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여공 신정순 역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김선재말고는 모두 전문 배우가 아니다. 따라서 잘 만든 여느 영화에서처럼 연기의 맛을 즐길 수 없다.

그들의 몸동작과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어색한 대사 처리는 영화 보기를 방해한다. 일상 대화의 틈에서 삐져 나오는 과거사와 연관된 화젯거리 탓에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 그들이 연기한다기보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그것은 그리 큰 흠이 아니다. 더욱이 연출력에 주목하면 그 결점은 상쇄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럴 법한데도 감독은 장황스럽지도 않고 감상에 흐르지도 않는다. 그는 중기의 취조 장면 이외에는 애써 80년대의 상황을 재현하지 않는다. 80년대는 그저 인물들의 말과 고민 속에서 나타날 뿐이다. 이러한 연출은,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과거를 상기하기보다 현재의 반성과 희망이 소중하다는 판단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절제력과 방향성이 돋보인다. 특히 희망이라는 주제에 착안하면 완구라는 캐릭터는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감정적 동요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지적인 판단을 원한다. 90분짜리 영화를 단지 백여 개의 쇼트로 구성했다는 것을 보아도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롱테이크와 감정 이입을 최대한 배제한 멀리 찍기 등의 리얼리즘 스타일은 영화의 주제와 문제 의식에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이 영화는 자극적인 재미와 흥행에 대한 강박 관념에서 매우 자유롭다. 그 점이 퍽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