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부인과>박철수 감독론
  • 宋 俊 기자 ()
  • 승인 1997.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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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특히 대사·음악 등 사운드를 매개로 한 복합 몽타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영화는 할수록 막막하고 고통스럽다. 도달해야 할 정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하는 데 가장 무서운 것은 고정 관
젊은 여의사 둘이 운영하는 산부인과 병원이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산부인과>(박철수 감독)의 무대이다. 의사·간호원·환자 등 등장 인물로만 보아서는 가히 여인에 의한, 여인을 위한, 여인의 왕국이다.

이 왕국은 늘 왁자지껄하다. 초조와 긴장, 울음, 아우성, 피와 비명이 난무한다. 이 요지경 왕국은 탄생과 죽음, 환호와 실망, 과학과 미망 들이 교차하는 접경에 위치한다. 이 왕국은 강고한 가부장 세계의 틈새에 건설된 섬이자 해방구이다. 해방구이되, 남성 권력이 빚은 온갖 형태의 편견·통념·인습 따위가 영공을 관통한다.

영화 <산부인과>는 이같은 촌극과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그리고 정확하게 담고 있다. 탄생을 둘러싼 이 시대 부조리의 영상 보고서이자 타임 캡슐인 것이다. 카메라는 시종 익살과 풍자의 눈길로 병동을 훑는다. 눈길은 예리하면서 따뜻하다.

<산부인과>에는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 산부인과에서 벌어지는 온갖 소동과 일화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을 뿐이다. 주인공도 불분명하다. 이 미묘한 구조로 인해 <산부인과>는 자칫 산만한 분위기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박철수 감독(50)은 이 위기를 너끈히 뛰어넘었다. 이 영화는 소설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한 편의 산문에 비견된다. 일관된 어조와 리듬, 절제된 억양과 색조, 영상의 긴장을 조절하는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 플롯을 이끄는 절묘한 시점 처리가 깔끔하게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 세련된 묘사와 익살·해학을 가미함으로써, 박감독은 모처럼 재미와 의미를 함께 낚는 성과를 거두었다.

<산부인과>는 <학생부군신위>(96년)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학생부군신위>는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사건을 좇으면서 삶의 진실과 허위, 위엄과 위선, 욕망과 갈등을 적나라하게 풍자한 작품이다. <산부인과>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일화가 5일장을 치르는 동안 숨가쁘게 벌어진다.

두 영화는 최근 박철수 감독이 영화 인생을 걸고 시도한 비장한 실험의 산물이다. 이 실험은 박철수 개인사에서뿐만 아니라, 과도기 한국 영화계의 행보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스토리 텔링’과의 결별이다. 한국 영화에서 줄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뚜렷한 스토리 없이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거의 없으리만큼 절대적이다. 게다가 박감독은 이야기 전개가 강점으로 꼽히던 연출가였다. 그가 자신의 특장을 버렸다. 위기감 때문이었다. 박감독은 인터뷰에서 위기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변화한 동기가 무엇인가?

90년대 들어 영화 환경이 급변했다. 대기업이 진출하고 신인 감독이 대거 등장하면서 감독의 세대 교체 조짐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흥행에 무신경한 감독으로 알려져 있던 데다가 ‘낡은 감각’이라는 평을 듣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때마침 내 영화에 대한 정체성에 의문을 갖고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떻게 변화를 모색했나?

막막했다. 제작자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내친 김에 아무 간섭 받지 않고 내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작정했다. 말 그대로 독립 영화를 택한 것이다. 92~93년 사이 1년여 독립 영화의 성지로 불리는 뉴욕을 찾아 여러 작가를 만났고, 하루 5~6편씩 영화를 보았다. 이란·파키스탄·페루 등 제3 세계 영화들도 흔히 상영되는데, 한국 영화는 없었다.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돌아와서 ‘박철수 필름’을 세웠다. 확실히 정한 것은 ‘실험·창의’라는 두 원칙뿐이었다.
말처럼 쉽지 않았을 텐데….

퇴직금·원고료·강의료 등 모아 두었던 몇푼으로 작품을 시작하고, 친구들을 찾아가 모금했다. 그 첫 작품이 <301·302>였다.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할 만큼 흥행은 꿈도 못꿀 영화였다. 메거폰을 놓고 낙향하거나 강단으로 자리를 옮길 각오를 했다.

예상대로 <301·302>는 흥행에 참패하지 않았는가?

한국 시장에 안먹힐 경우에 대비해서 해외 배급을 물색했는데, 외국에서 반응이 왔다. 일본에서는 3개월간 롱런하기도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제작자가 나섰다. 천행이었다.

드라마투르기와 결별한 까닭은?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의 변화에 뒤질 때 관객은 고개를 돌린다. 현실 변화의 속도를 추월하려 집착하다가 자칫 영화가 ‘픽션을 위한 픽션’으로 전락하는 것도 싫었다. 대신 세상과 인생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일상을 세밀히 관찰하기, 가까이서 살펴보기가 그 방법이었다. <학생부군신위>와 <산부인과>는 바로 우리 세상을 되살펴보는 모델 하우스이다.

박철수 감독의 승부수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뉴욕의 배급사인 ‘애로우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301·302>가 세계로 배급되었고, 지난 5월29일 폐막된 제12회 타슈켄트 국제 영화제에서는 <학생부군신위>가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산부인과>는 개봉 초기부터 기대 밖의 관객을 맞고 있다.

박감독이 거둔 성과는, 자신의 연출 방식에 걸맞는 영상 문법을 찾으려는 실험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박감독은 우선 제작비 산출 방식에서 여느 경우와 다르다. 박씨에 따르면, 인구가 2억이 넘는 일본의 평균 영화 제작비는 80만~90만달러(약 7억~8억원), 동남아 전체를 기반으로 세계를 상대하는 홍콩 영화의 경우 1백50만달러(약 13억원) 안팎이다. 인구 4천만인 우리나라의 평균 제작비는 13억원 안팎. 그러고도 작품 수준은 홍콩·일본에 뒤떨어진다.

“6억~8억원 정도가 우리 실정에 맞는다. 제작비가 터무니없이 높은 것은 스타의 몸값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스타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는가? 스타가 정말 영화의 질을 높이고 흥행을 보장하는가?”라고 박감독은 지적한다. 그래서 박감독의 영화에는 몸값이 1억원을 넘는 스타가 등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겹치기 출연은 딱 질색이다.

박감독은 연기자와 연출부가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박철수 특유의 장기가 나온다. 박철수 감독은 다작이 특징이다. 공백기를 빼고 따지면 매년 1편 이상 영화를 제작했다. 게다가 평균 촬영 기간은 보름 정도, 속사 촬영의 명수다.

속사라 해서 영화가 졸속으로 그치면 의미가 없다. 박감독은 치밀한 사전 작업으로 이를 방비한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0여 일에 걸쳐 연습과 토론을 반복한다. <301·302>에서는 밤에 불 없이 주방에서 칼 찾아 오기, 책장에 꽂힌 책 바로 찾아 오기 같은 연습으로 세트장이 자기 집처럼 익숙해지도록 했다. <학생부군신위>에서는 마을 사람들과 1주일이 넘게 연습을 거듭했다. 그의 영화에서 엑스트라가 유난히 공을 세우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머리 속에는 늘 영화 4~5편이 꿈틀대고 있다. 초기 기획 단계에서부터 작업 직전의 것까지 여러 영화가 오랜 숙성을 거치면서 촬영을 기다리는 것이다. 박감독은 지금 재일 교포 소설가 유미리씨의 중편 <가족 시네마>의 영화화를 구상 중이다. 그 다음 작품은 세기 말 서울의 풍속도를 그릴 <모델하우스 보이>이다. 두 편 다 <학생부군신위>와 <산부인과>의 형식을 계승하되, 고정 관념을 파괴하고 새로운 실험을 가미할 계획이라고 한다. 특히 일본어로 제작할 <가족 시네마>에 이어, <모델하우스 보이>는 한글과 영어로 두 편을 동시 제작할 계획이다. 해외 시장을 겨냥한 복안이다.

그의 미학은 아직 완성형이 아니다. 거칠고 부박한 장면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가 최근 열어 보인 새 지평은 여전히 기꺼워 보인다. 실험의 가치는 단기적인 완결성보다 도전하는 비장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늘 오늘을 파괴하여 내일을 여는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다”라고 박감독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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