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한국사>펴낸 이이화씨
  • 魯順同 기자 ()
  • 승인 1998.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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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사> 4권 펴낸 이이화씨/생활 문화사 중심으로 기술… 2003년 24권 완간
시인 고 은은 그를 ‘유랑민’이라고 하고, 동료들은 방외거사(方外居士:세속을 벗어난 고결한 선비)라 부른다. 재야 사학자 이이화씨(61)를 일컫는 말이다. 유홍준씨는 이씨에 대해 ‘세상이 줄 수 있는 학문적 편의(便宜)와, 관(官)의 혜택을 터럭만큼도 받은 일 없이 40여 년 동안 역사 탐구에 몰두했다’며 존경을 표시했다.

이씨는 최근 <이야기 한국사>(한길사) 스물 네 권 가운데 1차분 네 권, 1권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2권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를 찾아서> 3권 <삼국의 세력 다툼과 중국과의 전쟁> 4권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를 내놓았다(2003년 완간 예정).

한 개인이 이처럼 방대한 사서 집필을 맡은 것은 출판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이씨의 역량을 짐작케 한다. 이씨는 대학 졸업장조차 없는 재야 사학자이다. 여관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마친 그의 최종 학력은 서라벌예대 중퇴.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명(文名)을 날린 그는, 그곳에서 소설가 천승세·김주영 등과 교유하며 잠시나마 문학 청년의 꿈을 키우다가 집안 사정 때문에 문학 청년 시절을 마감했다.

근거 희박한 민족 우월주의 깨려고 애써

그가 한반도 역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불교 시보>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조사국에서 일하면서부터. 사료에 묻혀 살던 그는 70년대 중반 학계의 정설을 통박하는 논문을 내놓으면서 역사학계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허 균의 개혁 사상>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 등이 대표적인 초기 논문이다. 이후 그는 80년대 중반 박태순·박현채·고 은·신경림 등과 함께 한길사가 주최하는 역사 기행을 주도하면서 재야 사학자로 자리를 굳혔다. 일반인들 사이에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던 그 시절, 이씨는 빨치산 근거지였던 지리산과 전봉준 생가 등을 돌아다니며 답사객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 주느라 숨이 가빴다. “열기가 대단했지. 버스를 두세 대씩 빌려도 모자랄 지경이었어. 낮엔 유적지를 둘러보고, 밤새워 토론하고. 80년대의 열기에 비하면 요즘 답사는 맹탕이야.”

요즘 그는 당시의 흥분을 다시 느낀다고 했다. 4년 동안의 ‘자발적인 유배 생활’끝에 내놓은 <이야기 한국사> 네 권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책에는 홀로 사료를 뒤적이고 현장을 뛰어다니며 체득한 역사 의식이 곳곳에 배어 있다.

수십 년간 한국사 연구에 매달려 온 그로서도 <이야기 한국사> 집필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원칙을 세웠다. 소설같이 재미있고 쉽게 쓸 것, 역사를 객관화할 것, 생활 문화사 중심으로 쓸 것. 말랑한 이야기체로 쓰인 그의 책에는 된장은 언제 처음 먹기 시작했으며, 여자는 언제부터 말을 타기 시작했는지, 바보 온달 설화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실려 있어 흥미를 더한다. 특히 그는‘외침(外侵)을 9백 번이나 물리친 민족’이라는 식의, 근거가 희박한 민족 우월주의를 깨려고 애썼다. 한국사를 바로 보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세세한 자료까지 샅샅이 뒤졌다.

이처럼 번거롭고 고된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이씨의 빼어난 한문 실력 덕이다. 아버지에게 한자 교육을 받은 그는 열 살 남짓에 어른을 가르칠 만큼 한문 실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그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었으며, 사료에 능통한 만큼 사료에 숨은 함정에도 눈이 밝았다. “내가 규장각에서 일할 때 연구자들은 죄다 상게서(上揭書), 본서(本書)라는 말을 썼지.‘위의 책’‘이 책’이라고 하면 될 걸 왜 그랬는지 몰라. 또 사료도 잘 가려서 봐야 해. 어차피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 추려지기 마련이거든.”

한문 실력과 문학 청년 시절 갈고 닦은 우리말 실력은 큰 자산이었지만, 그는 특유의 자유인 기질로 재야로 나섰다. 그는 “성장기에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한 탓일까. 이상하게 제도와는 담을 쌓고 살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의 기질은 서울대 규장각과 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에서 일할 때 있었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규장각측이 국역 작업을 제의하자 그는 ‘일은 제대로 할 테니 일절 생활에 간섭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는 정문연이 주도하는 <민족대백과사전> 편집에 관여했다가 곧 그만두기도 했다. ‘정권의 하수인들이 들락거리면서 유신·국가 안보 따위 항목을 넣으라고 종용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였다. “재야 사학자 생활, 고달파도 외롭지 않아”

그는 한문 교과서를 집필할 때조차도 집필자들이 으레 끼워 넣었던 어휘들을 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불의에 적극 항거할 만한 그릇이 못 된다고 아쉬워하지만, 흰 것을 희다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에 상식적인 판단을 좇는 삶이 평탄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짧은 조직 생활을 청산한 그는 원고료로만 생활을 꾸리는 자유 기고가의 길에 들어섰다. 생계 부담이 만만치 않았지만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잡지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돈은 되지 않지만) 적(籍)을 갖게 된 것은 86년 역사문제연구소가 출범하면서부터. 박원순 변호사와 문학 평론가 임헌영 씨 등이 진보적인 사학 연구소를 만들자고 뜻을 모을 때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동참했다. 89년 소장이 된 그는 계간지 <역사비평>을 발행하고, 동학 100주년 기념 사업을 추진하는 등 근·현대사 재조명 작업에 신명을 바쳤다.

그리고 그는 사료를 ‘거꾸로’ 읽으면서 개혁적인 인물의 자취를 찾아내는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는데, 그 성과가 <이야기 인물 한국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재야 사학자라고 하면 외롭고 힘들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 내 시각에 동조하는 젊은 사학자도 많고, 취지에 공감해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도 있는데 뭘.”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렇다고 각별한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견뎌야 할 만큼 힘겨운 삶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찾는 이들이 많아 집필할 때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그의 자택은 기자들로 문전성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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