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부산국제영화제 지상 시사회
  • 부산·魯順同 기자 ()
  • 승인 1999.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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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신인 감독 작품 ‘넘실’… 영화 사고 파는 시장으로 자리잡아
올해로 4회째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지난 10월14일 닻을 올렸다. 대회 나흘 째인 17일 현재 총 29만6천6백10석 가운데 15만8천석 이상이 예매되어, 53% 예매율을 기록했다. 상영작이 2백여 편을 넘어서고, 영화제가 중반임을 감안하면 관객의 열기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중반을 맞은 지금까지 최대의 화제작은 단연 <박하사탕>이다. 한국 영화로서는 처음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은, 영화제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큰 몫을 했다. 예년에 비해 눈길을 끄는 문제작이 없다는 평가를 받은 터여서 반가움은 더했다.

한국 영화 <거짓말> <송어> 등 풍성한 화제

밤늦게 마련된 <박하사탕> 상영 축하 파티는 이를 잘 보여주었다. 영화제 조직위원회가 주관한 공식 모임에 이어 뒤늦게 시작된 이 자리에, 공식 행사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든 것이다. 3백여 명이 넘는‘하객’들이 바닷가 횟집에서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예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었다. 자리를 주관한 이스트 필름 대표인 배우 명계남의 목소리에는 저절로 흥이 실렸다.

<거짓말> <송어>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구멍> 등 처음 선보이는 한국 영화도 풍성한 화제를 뿌렸다. <거짓말>은 예매 20분 만에 표가 동이 날 만큼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작품답게 관람평도 다양했다. 영화사측은 마스킹 처리하지 않은 해외판을 선보였는데, 영화를 본 관객들은‘생각보다 발랄하다’는 평을 내놓았다.

남포동 극장가에 마련된 야외 특설무대는 영화제를 열린 축제로 자리매김하는 데 톡톡히 기여하고 있다. 매일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면서,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았던 것이다. 부산극장과 대영극장 사이에 마련된 특설 무대는, 별다른 행사 없이 토론 만으로 꾸며지는 데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영화제가, 창작자와 관객을 위한 잔치 마당일 뿐 아니라, 영화를 사고 파는 주요 시장이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산국제영화제의 잠재력은 한층 커진다.
한국 영화, 해외 자본 유치 가능성 엿보여

지난해 출범한 부산 PPP(부산프로모션플랜)는 영화를 사고 파는 시장 기능에 주목한 기획이라 하겠다. 부산 PPP의 장점은 기획 중인 영화를 사고 팔 수 있다는 것이다. 창작자는 시나리오나 기획서만으로 투자자를 물색할 수 있어 좋고, 투자자는 좋은 작품을 선점할 수 있다. 현재 대상 격인 부산상을 비롯해 후버트 발트상· 일신상·유니 코리아상·한울상 등 총 7개의 기금이 마련되어 있다. 올해 PPP 출품작은 총 17편.

한국 감독으로는 배창호·김기덕·김응수 감독이 기획안을 출품했다. 17일 발표된 바에 따르면 대상 격인 부산상(상금 2만 달러)은 홍콩의 새 별 프루트 챈 감독의 <리틀 청>이 차지했다. 이밖에 <운니>(인도·무랄 리 나이르/후버트 발트상)와 <언포겟터블> (일본·시도사키 마코토/일신상),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한국·김응수/유니 코리아상) <나의 사랑 아프리카>(한국·배창호/ 한울상) 등이 확정되었다.

PPP에 출품된 작품은 PPP에 등록된 각종 기금을 수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싹수 있는 작품을 찾는 외국 투자사나 배급사의 눈에 띌 기회가 많다. 부산상을 후원하는 부산시도 발벗고 나섰다. 부산을 아시아 영화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의욕을 갖고 있는 부산시로서는, 창작자와 제작자를 적극 끌어들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부산시는 현재 출연 기금이 2억 원인 부산 펀드를 2002년까지 총 백만 달러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발맞추어 부산 PPP는 올해부터 완성작도 출품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내년부터는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작품도 포함할 계획이다.

올해 PPP의 가장 큰 성과는 이 테이블을 통해 한국 영화가 해외 자본을 유치할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현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품은 혼혈 청년 이야기를 담은 김기덕 감독의 신작 <수취인 불명>.

김감독에 따르면, 이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곳은 독일의 제작사 필름보드 베를린과 캐나다의 시네마 에스페란카 인터내셔널이다.

다만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이 밀라노 견본시와 겹쳐 해외 프로듀서를 끌어들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프랑스, 집요한 홍보 공세

올해도 프랑스는 집요한 홍보 공세로 눈길을 끌었다. 동양에서 가장 관객이 많은 영화제라는 명성 때문인지, 프랑스는 지난해부터 자체 경비를 들여 프랑스 영화 주간을 마련하고 있다. 올해 프랑스 대표단(단장 레지스 바르니에 같은호‘사람과 사람’난 참조)은 총 열세 편의 영화를 들고 부산을 찾았고, 이 가운데 <이스트 웨스트> <비시즈드> 등 네 편을 야외 상영작으로 끼워넣었다. 앉아서 영화제 주최측의 초청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작을 들고 와서 배급사를 찾는 적극적인 전략인 셈이다.

영화제의 경쟁 부문인 ‘뉴 커런츠(새로운 물결)’가 높은 매진율을 기록한 것은, 관객이 해외에서 검증된 명작 이외에도 개성적인 작품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었다. 출품작 열두 편 가운데 아홉 편이 일찌감치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부탄 영화 <컵>과 일본 영화 <가을 국화> 대만 영화 <엽서> 등이 인기를 모았다.

기타노 다케시, 철없는 건달로 변신

아직까지 부산의 인기 품목은 단연 일본과 중국권 영화였다. 기타노 다케시의 칸 영화제 출품작 <기쿠지로의 여름>은, 공식 해적판까지 매진되는 등 인기가 대단했다. 다케시의 <기쿠지로의 여름>은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하는 소년 마사오와, 그를 데리고 길을 나선 폭력배 기쿠지로의 교감을 그린 작품. 공식 해적판은, 영화 장면은 한 컷도 삽입하지 않고 촬영장 모습만으로 전편을 구성한 다큐멘터리이다.

‘블루 다케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섬뜩한 폭력의 세계를 그려온 기타노 다케시가, 정반대로 몸을 돌려 만든 코미디라고 해서 더욱 관심이 높았던 것이다. 다케시는 카리스마를 지닌 야쿠자에서 철없고 뻔뻔한 야쿠자 출신 건달로 변신했다.

지난해 일본 최고의 흥행작 <철도원>도 일치감치 매진이었다. 지금까지 선보였던 일본 영화 가운데 가장 온건하고 잔잔한 작품일 <철도원>은, 말 그대로 전후 일본 건설의 기관차 구실을 했던 기차에 대한 향수를 가득 담고 있다.

올해는 아시아의 신인들에게 개방적이었던 부산영화제가, 그들과 함께 연륜을 쌓아간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특히 부산을 통해 처음 국내 관객에게 이름을 알린 감독들은 더욱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지난해 <동경의 주먹>을 선보인 쓰카모토 신야 감독은 신작 <쌍생아>를, 첫해에 새로운 물결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던 <동궁서궁>의 장위엔 감독은 <17년 후>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홍콩 감독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은 이는 단연 프루트 챈이었다. <메이드 인 홍콩>으로 팬을 확보한 그는, ‘홍콩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그 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를 들고 부산을 찾았다. 홍콩 반환 직전에 해체된 홍콩 주재 영국군 출신인 가인과 그의 동생 가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97년 홍콩 반환을 바라보는 홍콩 사람들의 정서를 담아냈다. 전작에 비해 다소 산만해졌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프루트 챈은 외국 감독 가운데 가장 바쁜 일정을 보냈다.

특히 두 작품에 모두 출연한 배우 리찬썽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독차지했다. 스크린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그에게 쏠린 인기를 의식한 듯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던 사회자는‘사적인 감정 표현 금지’라는 이색 조항을 내걸기도 했다.

신작은 없었지만, 부산 PPP를 통해 제작 지원을 받았던 <소무>의 지아 장케 감독은 뉴 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영화제와의 인연을 과시했다.
노감독·젊은 관객의 만남 자리 돋보여

외국의 새로운 영화에만 관심이 쏠린 것은 아니었다. 젊은 관객과 노감독의 만남은, 세대간 의사 소통의 가능성을 엿보게 해주었다.

‘유현목, 한국 리얼리즘의 길 찾기’라는 주제로 마련된 유현목 감독 회고전은 젊은 관객으로 북적였다. 특별 심포지엄은 여느 상영관 못지 않게 열기가 뜨 거웠다. <오발탄>을 비롯해 <장마> <사람의 아들> 등을 소개하고 그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선보였고, 선·후배 평론가는 그의 작품 세계를 분석한 평론집을 때맞추어 발간했다.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로 나선 영화 평론가 이효인은,‘유현목은 한국 영화다’라는 명제를 던졌다. 그가 제기한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한국 영화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깐깐한 노감독은, 몰려든 젊은 관객을 보고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잊혀가는 나를 불러주어 고맙다. 나는 영화를 찍느라 몸을 많이 써서 아직 팔팔하다. 더욱 힘을 내 후학 양성에 힘쓰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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