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이면 활보한 비주류 인생들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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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지음 <조선의 뒷골목 풍경>
탐관오리들의 부정한 재물을 훔쳐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처마와 처마 사이를 날아다니고, 벽에 붙어 날래기가 귀신이다. 도둑을 맞은 집은 어떤 도둑이 들었는지 모를 것이지만 스스로 자기의 표지를 매화 한 가지 붉게, 찍어놓는다. 대개 혐의를 남에게 옮기지 않으려는 까닭이었다.’

의적 일지매 이야기다. 고우영의 만화로나 익숙하겠지만, 사실은 ‘책에 나오는(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이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을 펴낸 강명관 교수(부산대·한문학과)는 이 일지매에게 반한 것 같다. ‘김정희의 <세한도>보다 일지매의 붉은 매화에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더 강하게 느낀다’고 말할 정도다.

‘단독 플레이’로 시종했던 일지매에 비해 임꺽정이나 장길산 같은 ‘떼도둑’의 괴수들은 어땠을까. 저자의 호오(好惡)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이른바 ‘땡추’들이 그 떼도둑의 연락책 노릇을 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땡추에는 금강산 땡추와 지리산 땡추가 양대 산맥을 이루었는데…객승 비슷하게 꾸미고서는 때로 산적패(화적단)의 통신망이 되어주기도 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일지매 같은 도둑을 비롯해 술꾼·건달·투전꾼 등 역사의 이면을 활보했던 마이너리티의 조선사를 다루고 있다. ‘왕과 양반처럼 고귀한 신분이거나 무언가 큰 사고를 친’ 사람들만 기억하는 역사가 아니라, 지배자 중심의 역사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당한 서민들의 ‘시시하고 한심한’ 삶과 문화를 생생하게 되살렸다.

조선 시대 최고의 섹스 스캔들로 일컬어지는 감동과 어우동을 비롯해, 툭하면 시행된 금주령을 비웃듯 질펀한 술판을 벌였던 술꾼, 양반 출신이면서도 투전판 최고의 ‘타짜’가 된 사람, 기생들의 기둥서방을 했던 ‘왈자’, 과거장의 대리 시험생 같은 비주류 인생들이,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이 된다. ‘거창’ ‘치밀’ ‘엄숙’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같은 비주류 인생들의 뒷골목 탐사를 위해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은 물론 <황성신문> 같은 구한말 자료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요즘의 오렌지족에 해당하는 유흥가의 큰손이었던 ‘별감’들의 생활상은 <한양가> 같은 노래 가사를 통해 복원했다. 심지어는 김 구의 <백범일지>조차 인용되는데, 그에 따르면 김 구는 활빈당이니 불한당이니 하는 비밀 결사의 조직 체계를 독립운동에 원용하려고 했다.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조선 사람들의 역사’를 지향하는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역사와 현재를 잇는 팽팽한 긴장. 조선 후기 도둑떼의 출현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뿌리 깊은 부조리를, 도박이 성행한 것에서 우연과 불확실성이 똬리를 틀고 있는 세상사를, 타락한 과거장의 모습에서 고시 열풍에 휩싸인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역사는 책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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