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 두 눈으로 되짚는 한국 근·현대사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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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현·박노자 지음 <우리 역사 최전선>
16세기 조선 사람 퇴계 이 황과 고봉 기대승은 서찰을 주고받으며 사단칠정론 논쟁을 벌였지만, 21세기 한국의 소장 역사학자 두 사람은 e메일을 교환하며 우리 근·현대사의 쟁점을 토론했다. 주인공은 ‘건강한 보수’라고 자임하는 허동현 교수(경희대)와 ‘개인주의적 진보’를 지향한다는 박노자 교수(오슬로 대학). 한때 같은 대학에 몸 담았던 인연으로 3년 동안 주고받은 이들의 사적 논쟁이 ‘소문이 나면서’ 한 신문의 지상 논쟁으로 공론화했고, 그 공론의 결과물로 최근 <우리 역사 최전선>(푸른역사 펴냄)이라는 책이 나온 것이다.

논쟁의 출발점은 100년 전과 지금의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었다. 청·일 두 나라와 서양 열강의 각축 속에서 근대라는 화두를 놓고 고심했던 선조들이나,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새로운 ‘출구’를 찾고 있는 지금의 우리나, 시대적 요구와 현실적 한계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인식을 공유한 저자들은 자연히 우리의 근대가 시작된 시점에서 빚어졌던 변화와 혼돈에 주목하게 되었다.

논쟁을 지향하니만치 동일한 사안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과 평가가 갈리는 것은 물론인데, 가령 최익현을 정점으로 하는 위정척사파가 대표적이다. 최익현과 빈 라덴에게서 논리적 공통점을 발견하는 박교수는 위정척사파의 의병 운동을 유교적 근본주의 이념에 입각한 반침략 투쟁의 상징으로 비교적 높이 평가한다. 반면 허교수는 ‘그들이 지키려고 한 것은 시대착오적 구체제’라고 비판한다. 최익현이나 빈 라덴이 상대방(일본이나 미국)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서, 혹은 약자나 패자라고 해서 그들의 잘못까지 감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전통적) 지식인들만의 권력 독점을 꿈꾼다는 점에서 그들은 오히려 몽상가에 불과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조선 정부의 가톨릭 박해에 대항해 외국 군대 파병을 요청한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박교수는, 황사영을 단순히 외세의 앞잡이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보편적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유엔에 탄원한 것쯤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허교수는 황사영 백서를 인권 선언과 국제적 연대의 이정표로 재평가할 수도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개인의 신념을 위해 또 다른 폭력을 부른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지배보다 나은가?’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견해가 부딪친다. 개발 독재나 제국주의 외세가 모두 야수적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대체로 박교수는 그렇다, 허교수는 아니다, 쪽이다. 구한말의 유혈 쿠데타 갑신정변에 대해서도 근대화 지상주의자들(개화파)의 끔찍한 살육이 혁명으로 미화되었다(박노자),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가 현실에 존재한 적은 없었다(허동현)고 서로 다르게 평가한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윤치호와 친미, 유교와 사회주의, 흥선 대원군, 아나키즘 등 한국 근·현대사의 열한 가지 쟁점이 진보와 보수 두 가지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하지만 두 저자의 진보와 보수는 한국적 특수 상황 속의 진보와 보수처럼 극단적으로 날을 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논쟁을 진행하기 위한 역할 분담에 가깝다. 그럼으로써 이 책은 ‘다르게 보지만 함께 읽는 역사책’이 되는 데 성공한다. 화끈하게 치고받는 갑론을박이 없으면서도 시종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다.

역사란 사관(史觀)에다 사실이라는 살을 붙이는 것(박노자)이며, 따라서 역사학은 과학이기보다는 문학에 가깝다(허동현)는 저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더욱 흥미롭다. 최익현의 강화조약 체결 반대 상소문, 황사영 백서 등 일반 독자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문헌 자료의 전문을 책 뒤에 따로 모은 것도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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